구정동 방형분, 효소, 성덕왕릉, 신문왕릉
답사일 : 2018. 9. 4
9월의 초입, 벌써 가을이 성큼 느껴진다.
100일간 꽃을 피우기에 백일홍이라고 부르는 배롱나무꽃이
여름의 막바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경주의 가을은 유달리 더 푸르고, 붉고 화려한 것 같다.
구정동 방형분과 효소왕릉은 처음 접하는 곳이라
기대하는 마음으로 발길을 옮겼다.
경주 구정동 방형분
사적 제27호 (1963.01.21 지정)
통일신라 때의 유일한 방형분(方形墳)으로 고려시대의 동식고분(同式古墳)의 계통을 알려주는 귀중한 고고학적 자료이다.
이 무덤은 경주 시내에서 약 9km 떨어진 대덕산(大德山) 남쪽 구릉 말단과 접하는 평지에 위치해 있으며,
네모나기 때문에 '방형분'이라 불린다. 남쪽으로 널길이 나 있고 그 안에 쌍여닫이 돌문이 있는 돌방무덤[石室墳]이다.
한 변이 9m, 높이는 2.7m인 봉토로 되어 있다. 돌방 서쪽에는 주검과 널을 얹었던 돌받침대가 있다.
바깥 아래쪽은 다듬은 돌로 호석(護石)을 둘렀고 방향에 따라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이 조각되어 있다.
모서리에 세웠던 돌기둥에는 무인상과 사자상이 돋을새김되어 있으며,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 전시하고 있다.
묻힌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네모무덤으로 특이한 것이다.
* 호석(護石)
무덤의 봉분이 유실되는 것을 방지하고 무덤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하단 가장자리에 돌려둔 깬돌이나 판돌. 둘레돌, 보호석
(출처: 문화재청)
이 봉분 남쪽 면의 중앙으로 통하는 입구로 해서 안으로 들여다 보면 석실 바닥에 관을 받치는 돌로 만드는 관대가 놓여져 있다.
설명이 잘 되어있다.
사면에 3개씩 마련된 12지신상의 지석이 우아한 조각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 시대의 무덤으로 추정되고 있다.
현재 남쪽 석실입구가 개방되어 있는 구정동 방형분의 모습
경주 효소왕릉(慶州 孝昭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제32대 효소왕(재위 692∼702) 무덤이다.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4호로 지정되었다.
효소왕릉 안내판
신문왕(재위 681∼692)의 아들로서 삼국을 통일한 후 안정과 발전이 있던 시기에 왕위에 올라
서시전과 남시전 등 시장을 열어 물품의 유통을 쉽게 하였다.
높이 4.3m, 지름 10.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석을 돌렸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무덤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혼령이 머무는 자리라는 혼유석만이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02년에 왕이 죽자 이름을 효소라 하고 망덕사 동쪽에 장사지냈다고 했으나,
현재 서쪽에 있는 이 무덤은 망덕사지에서 남남동 방향으로 약 8km 거리에 있어 차이가 많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망덕사지 동쪽에 있는 신문왕릉을 효소왕릉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출처: 문화재청)
성덕왕릉 귀부
(유형문화재 제96호)
통일신라 성덕왕(재위 702∼737)의 능 앞에 세웠던 비석의 받침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둘째 아들로, 형인 효소왕이 아들이 없이 죽자 화백회의에서 그를 왕으로 추대하였다.
비는 원래는 비몸과 그 위에 머릿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모두 없어지고 지금은 이 받침돌만 남아 있다.
받침의 거북은 목이 부러졌으며, 앞·뒷발에는 발톱을 새겨 놓았다.
등에는 6각형 무늬를 새겼으며, 중앙에 비몸을 꽂았던 네모난 홈이 파여 있다.
거북의 등에 새긴 무늬나 다른 덩굴무늬를 통해 8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짐작된다.
비록 비몸과 머릿돌이 없어졌으나 왕릉을 만들 때 이용된 거북받침돌의 제작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출처: 경주문화관광 홈페이지)
성덕왕릉에서 남쪽으로 100m쯤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다.
성덕왕릉(聖德王陵)
( 대한민국의 사적 제28호로)
경상북도 경주시 조양동에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의 무덤이다.
경주에서 불국사 방향으로 가는 길의 동남쪽 구릉 소나무숲 속에 자리하고 있는 신라 제33대 성덕왕(재위 701∼737)의 무덤이다.
성덕왕은 신문왕의 아들로 본명은 융기이다. 당과 적극적인 교류를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가장 안정된 신라의 전성기를 이끌어 나갔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737년에 왕이 죽자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현재 왕릉 북쪽에 이거사로 추정되는 절터가 있다.
이 능은 밑둘레 46m 높이5m이다.
무덤 아래부분에는 둘레돌을 배치하여 무덤을 보호하도록 하였는데, 높이 90cm 정도의 돌(면석)을 두르고 그 위에 덮개돌인 갑석을 올렸다.
면석 사이에는 기둥 역할을 하는 탱석을 끼워 고정시켰으며, 그 바깥쪽에 삼각형의 돌을 세워 받치고 있다.
삼각형의 받침돌 사이에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는데 네모난 돌 위에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서 있는 모습의 조각이 심하게 파손되어 있다.
무덤 앞쪽에는 석상이 놓여있고 무덤 주위의 4모서리에는 돌사자를 배치하였다.
석상 앞쪽 양 옆으로 문인석·무인석 각 1쌍을 세웠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무인석 1개와 상반신만 남은 석인(石人) 1개가 남아 있다.
성덕왕릉에서 보이고 있는 석물의 사실적인 조각기법은 통일신라 초기 양식에 속하며,
왕릉은 통일신라시대의 왕릉으로서 완비된 모습을 갖추고 있다.(출처: 문화재청)
경주 신문왕릉(慶州 神文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에 있는 신라 31대 신문왕(재위 681∼692)의 무덤이다.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1호로 지정되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아들로 귀족들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신라 중대 전제왕권을 확고히 하였다.
국립교육기관인 국학을 설립하고, 지방통치를 위해 9주5소경제도를 설치하였고,
고구려·백제·말갈인을 포함시킨 중앙 군사조직인 9서당을 완성하는 등 중앙과 지방의 정치제도를 정비하여 전제왕권을 다졌다.
높이 7.6m, 지름 29.3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이다.
둘레돌은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5단으로 쌓았고 44개의 삼각형 받침돌이 둘레돌을 튼튼하게 받치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낭산(狼山) 동쪽에 신문왕을 장사지냈다고 되어있어,
낭산 동쪽 황복사터 아래쪽 12지신상이 남아있는 무너진 왕릉을 신문왕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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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해도, 어디를 가도 행복한 가을,
신문왕릉을 뒤로하고 걷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다.
역사의 발자취를 따라 걷는 길, 작은 행복이 가슴이 가득하다.
곧, 노랑고 빨갛게 물들 산하를 고대하며 다음 답사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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