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32> 나정, 남간사지, 창림사지

박태문 2018. 9. 3. 15:10




나정, 남간사지, 창림사지


답사일 : 2018년 8월 28일






유난히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2018년 여름의 끄트머리..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을것 같은 가을의 초입, 다시 경주로 갔다.

비가 살짝 뿌렸지만, 바람에서 제법 계절의 변화가 느껴져서 더욱 좋았다. 




신라의 천 년 흥망성쇠의 자취가 남아 있는 경주 남산..

시조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가 있는 경주 나정을 찾았다.






경주시 탑동에 있는 나정(蘿井)









신라 초대 왕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으로 전해지는 우물이 있는 장소로, 1970년에 이 자리를 사적 제245호로 지정하였다.










신라 천년의 역사를 지금까지도 발굴조사하며 끊임없이 스토리의 퍼즐이 맞춰지고 있는 현장이다..










조그마한 비각이 하나 있고 그 뒤편에 우물을 덮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넓은 판석이 중앙에 놓여있다.

주위에는 주춧돌로 보이는 4개의 돌이 규칙적으로 사방에 둘러져 있다.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전해오고 있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원년 임자(기원전 69)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자제를 거느리고 알천의 언덕 위에 모여서 의논하여 말하였다.

“우리들은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서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고 안일하여 제멋대로 하고 있소.

그러니 어찌 덕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삼고 나라를 세워 도읍을 정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들은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았는데 양산(楊山) 밑에 있는 나정(蘿井)가에 번갯빛처럼

이상한 기운이 땅에 드리워져 있고, 한 백마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곳을 찾아가보니 자줏빛 알(푸른빛의 큰 알이라고도 한다.) 하나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깨뜨리자 사내아이가 나왔는데 모습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이상하게 여기며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는데,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따라 춤을 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더니 해와 달이 맑고 밝아졌다. 그래서 이름을 혁거세왕이라고 하였다.









<나무위키> 자료에 의하면,


2대 왕 남해 차차웅 3년에 이곳에 시조묘를 세웠고, 이후에 이 자리에 신궁을 세우는데 이 때부터 수백년이 지난 통일신라대까지도

신라왕이 새로 즉위하면 반드시 즉위 초기에 신궁에서 제사를 지낸 기록들이 삼국사기에 나온다.

발굴 조사 전에는 일제강점기에 새로 세운 유허비(遺墟碑)[1]와 전각이 있고, 전각의 북쪽에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 초석 다섯 개가 있었다.

또한 담장이 전각과 화강암을 둘렀다. 사람들은 전각의 북쪽에 있는 네모난 초석 중 중앙에 있는

가로 세로 1.3 m 짜리 돌덩이가 나정이 있던 자리라고 생각했다.



2002년에 전각과 초석들을 두른 담장 일부가 허물어져 보수할 필요가 생겼다.

하여 법률에 따라 조사단을 꾸리고 경주 박씨 문중에 이를 알려 개토제를 지낸 뒤 형식적인 발굴조사작업을 하였다.

그런데 조사를 시작하고 보니, 조사단조차 미처 예상치 못한 팔각형 건물터를 발견하였다.


조사 결과 한 변이 8 m, 지름이 20 m 정도 되는 8각 목조건물을 세웠던 흔적인 초석 50여 개와 둥근 돌기단의 흔적이 나왔던 것이다.

출토된 기와를 통해 신라의 유적임도 확인하였다. 8각형 건물은 지금까지 삼국시대 건축물 가운데 고구려형식으로만 알려졌지만,

신라에서도 8각 건물터가 발견된 것이다. 또한 앞서 말한대로 이 건물은 4각형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어

천단의 성격을 지녔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와 역시 품질로 미루어보면 고급건물이었다.

이로써 나정에 신궁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절충설에 힘이 붙게 되었다.


그런데 정작 나정이 있던 자리로 전해지던, 네모난 중앙 화강암 초석 자리는 우물 터가 아니라

팔각형 건물 중앙부에 나무 기둥을 세우기 위한 초석 자리였다.

하지만 초석 자리에서 남쪽으로 4~5m 가량 떨어진 곳에서 새로운 우물터가 발견되었다.

새로 발견된 우물 터는 강돌을 밑에 설치한 것 등을 보아 실제 우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우물은 의도적으로 매립된 흔적이 보인다.

이 우물 자리를 중심으로 이 팔각형 신궁 건물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원형의 배수로 흔적이 발견되었다.

아마도 어떠한 건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삼국사기에 나오는 박혁거세의 아들인 남해 차차웅 3년(서기 6)

세워졌다던 박혁거세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동안 나정이라고 불린 화강암으로 덮힌 곳이 실제로는 우물이 아닌 이유는 알 수 없다.

즉, 원래는 우물이 있었는데 이 우물을 메우고 우물 자리를 중심으로 원형의 시설을 세웠다.

그런데 후대에(문무왕 즈음으로 추정) 원형 시설을 부수고 원래 원형 시설 자리를 전부 포함할 만큼 큰 8각형 건물을 지었는데,

우물 자리에서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중앙 기둥을 세웠다.

나중에 이 모든 시설이 파괴되고 중앙 기둥을 세웠던 자리가 나정이라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고학적 발견이 삼국사기 등의 기록과 거의 일치하기 때문에,

그간 신뢰성이 낮다고 여겨지던 삼국시대 초기 기록들에 대한 신뢰성 역시 높아진 측면이 있다.

[원래 이 유허비는 조선 순조 3년(1803)에 세운 것을 일제시대에 같은 내용으로 비석을 복제하여 새로 세운 것이다.
원래 서 있던 비석은 땅 속에 묻혀 있었는데, 발굴 과정에서 발견하였다.
물론 앞서 말한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나을`이 나정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측은 있었다.
다만 그걸 증명하기 위해 발굴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정릉사, 청암리 사지 참고 삼국사기 초기 기록은
신라의 경우 지증왕 즉위(500년) 이전 기록들은 과연 정확한 것인지 부정되는 편이었는데,
고고학적인 발견이나 외국 당대 기록과 안 맞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는 초기 기록이 거의 완전히 못 믿을 것으로 간주됐고, 현대에는 절충안이 대세인데
초기 기록을 어디까지 믿는지는 학파마다 다르다.










경주 남간사지 석정(慶州 南澗寺址 石井)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3호로 지정



남간사는 신라의 승려 혜통의 집이 있었던 터에 창건한 사찰로 전하나, 정확히 언제 창건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이 돌우물 즉 석정은 남간사 옛 터에 있는 것으로, 땅을 파고 돌을 짜올린 후 그 위에 다듬은 돌로 틀을 얹은 모습이다.

우물 둘레에는 이중으로 테를 둘렀는데 윗단은 높은 직각을 이루고 아랫단은 곡선으로 낮게 새겨 변화를 주었다.

단순하면서도 간결하게 다듬어져 시원스럽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든 것으로,

현재는 이 우물 위로 시멘트로 만든 둥근 시설을 올려놓아 옛 모습을 제대로 찾아볼 수 없다.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慶州 南澗寺址 幢竿支柱)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남간사지에 있는 당간지주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는 남간사의 옛터에서 약 500m 떨어진 논 가운데에 세워져 있다.

경작하면서 지주의 아래부분이 약 50cm정도 드러나 있으며, 바닥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기단부가 없어서 기단 위에 당간을 세우던 받침돌도 찾아볼 수 없다.

지주 안쪽 면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구멍을 세 군데에 뚫어 놓았는데,

특히 꼭대기에 있는 것은 십(十)자 모양으로 되어 있어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소박하고 간단한 형태의 당간지주로, 보존된 상태도 양호한 통일신라 중기의 작품이다.

(출처: 문화재청)










지지대인지 방치되어 있다.










1987년 3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909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3.6미터로 당간지주 1기의 모습이다.








 시멘트 농로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창림사지 가는 길이 보인다.

발굴작업 때문인지 새로 길이 나 있다.


가을 초입의 싱그런 나무 사이로 창림사지 삼층석탑이 수줍게 고개를 내밀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창림사지 일대가 신라 최초 왕궁터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慶州 南山 昌林寺址 三層石塔)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남산에 있는 신라의 탑으로  2015년 3월 9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867호로 지정되었다



삼층석탑이 자리하고 있는 창림사지는 발굴조사를 통하여 경주 불국사 등 통일신라시대 가람에서 나타나는

층(공간)별 독립된 공간이 창림사에서 확인된 바 있으며 확장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 팔부신중을 조각한 석탑,

삼층석탑이 조성 됐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한다.











탑의 조성시기는 사리공 속에서 발견된 ´무구정탑원기와 ´무구정광대다라니´를 당시 이곳을 찾았던 추사 김정희가 모사하여 두었는데

그 속에 이 무구정탑의 조성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라 문성왕(844년)때로 추정하고 있으나

현재 이 기록에 대하여서는 다소 이견들이 있다. 석탑은 2중기단을 조성한 후 3개층 탑신부를 얹은 전형적인 신라 3층석탑의 모습이다.


기단부의 구성은 상, 하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부는 통돌에 하대면석과 지석으로 구분하여 치석하였고 면석에 각 돌마다 3개의 탱주를 두었다.

탱주의 개수는 석탑 변천의 가장 가시적인 지표로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로 석탑의 조성시기를 찾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그리고 10개의 석재로 구성된 탑의 하층기단부의 구성은 비슷한 시기에 8개의 석재로 조성된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고식에 가깝다는 견해가 있다.


특히 상부기단 면석에는 8부신중상을 양각하고 1구의 탱주를 두어 매우 화려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남면 1구, 서면 2구, 북면 1구만 남아있고 그 외 면석은 신재로 교체되어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창림사 탑 팔부신중 조각은 규모와 완성도면에서 그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고 있다.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팔부신중상이 조각된 예는 《안동 법흥사지 전탑》, 《화엄사 사사자탑》, 《인용사지탑》, 《진전사탑》 등과

인왕상이 조각된 《장항리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상이 조각된 《원원사지탑》 등과 조각수법을 비교해 볼 때도

기량 면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 사례로 인정받고 있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은 1976년 복원을 거치며 2, 3층 탑신과 상층 팔부신중상 중 4매, 기단석재 일부가 신재로 교체되고

상륜부가 없어 탑의 원형이 많은 부분 훼손된 상태이나, 창림사지는 신라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사지발굴을 통하여 석탑의 위치도 확인된 바 있고 경주 남산에 보존되고 있는 석탑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고 화려하다.


또한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부재를 중심으로 탑의 조성수법을 살펴보면 탑의 규모,

기단부의 구성과 상층기단부면석의 팔부신중상의 조각수법 등에서 신라석탑 조형의 흐름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어 보물로 지정 보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사료된다. (출처: 문화재청)









뒤돌아 본 창림사지 삼층석탑..  진중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