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30> 기림사

박태문 2018. 6. 4. 10:01




기림사



답사일 :2018년 5월 15일





오랜 역사만큼 보물같은 문화재가 즐비한 함월산 자락 기림사를 찾았다.

용이 솟아오를 것 같은 용소를 지나야 만날수 있는 기림사..
깊은 산골 사찰이 아님에도 백여미터 남짓한 예쁜 숲길이 아직도 생생하다. 

함월산 자락, "달을 머금었다 토한다"는 뜻을 지닌 기림사는 해방전만 하더라도 불국사를 말사로 거느릴 만큼 위세가 당당했다.

기림사는 신라에 불교가 전해진 직후인 643년(선덕여왕12) 천축국의 승려 광유(光有)가 500명의 제자를 교화한 뒤
창건한 후 임정사로 부르던 것을 원효가 중창해 머물면서 기림사로 개창했다고 전해진다.





기림사(祗林寺)는 경상북도 경주시함월산 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의 사찰이다.

신라인도 승려인 광유(光有)가 창건하고 이름은 임정사(林井寺)라고 했다.

643년원효가 중창한 뒤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기림사는 석가모니의 기원정사(祇園精舍)에서 '기'자를 따와 붙인 이름이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신문왕이 감포 앞바다에서 동해용왕으로부터 만파식적과 옥대를 선물로 받았다는 전설이 실려 있는데,

이때 신문왕이 귀환하는 도중에 기림사 서쪽에서 쉬었다 갔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창건 연대는 적어도 신문왕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을 위해 지은 감은사의 터나 문무왕릉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임진왜란 때는 전략적 요충지라 승병 운동의 중심지였다

철종 14년인 1863년에 화재로 소실된 것을 중건한 건물이 남아 있다.

보물 415호인 건칠보살좌상을 비롯하여 소조비로자나삼존불, 기림사 삼층석탑, 목탑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전 양식을 볼 수 있는 대적광전, 김시습의 사당인 매월당사 등을 보유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를 거의 입지 않아 문적과 어필이 다수 남아 있기도 하다.

일제 강점기에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조계종에서는 불국사의 말사로 편성되어 있다.

(출처: 신라문화진흥원)








기림사 진남루(鎭南樓.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51호)

천왕문을 지나면 제일 먼저 마주치는 건물로 정면 7칸, 측면 2칸의 익공계 겹처마의 맛배지붕 건물이며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조16년(1740년)의 사적기에 기록이 없어 그 이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건물의 용도는 기림사가 호국사찰로서 승병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범종각..


목어, 범종, 법고, 운판의 법전사물이 빠짐없이 자리잡고 있다.

유달리 목어의 눈이 시선을 끈다.

밤에도 눈을 뜨고있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서 정진하라는 뜻이기에

아마, 목어의 눈을 부각시켜 놓은듯 하다.










기림사 삼천불전(三千佛殿).

정면 7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 단층의 건물로 1990년에 지어졌으며 내부에는 삼천불을 모셔놓고 있다









현재의 기림사 삼천불전은 1990년경에 지은 건물이다.

1817년 초의선사가 기림사 근방에서 나온 옥돌로

천불을 조성해 모셨다가 1818년에 해남 대흥사로 옮겨 대흥사 천불전에 모셨다.










삼천불은 부처님이 항상 어디에서나 있다는 사상에서 유래하여

과거 천불, 현재 천불, 미래 천불의 의미를 담고 있다.

하여 이를 기려 삼천불전을 조성한 것이고 삼천불을 모셨다.


옥돌로 다듬은 삼천개의 불상이라.. 대단하다.









신문왕 호국 행차길


왕의 길이라 하나,, 왠지 권위적이고 화려할 것 같지만 오히려 정겹고 수수한 분위기다.


왕의 길은 편의상 네 구간으로 나누어진다.

경주시 내 월성에서 시작해 월지~능지탑~황복사지~명활산성~덕동호~추원마을~모차골~수릿재~세수방~용연폭포~

기림사~골굴사~감은사지~이견대~문무왕릉까지 동해로 이어지는 길을 말한다.


세 번째 구간에 해당하는 추원마을에서 기림사까지 걷는 왕의 길은 ‘신문왕 호국 행차길’로

석탈해가 신라로 들어왔던 길이자 문무왕 장례 행렬이 지나갔고, 신문왕이 마차를 타고 아버지 문무왕 묘를 찾아가

나라를 구원할 옥대와 만파식적을 얻기 위해 행차한 충효와 호국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초파일을 맞아 백등이 걸렸다.












유물전시관을 들러본다..









내부에는 경주 기림사 소조비로자나불 복장전적(보물 제959호)와 금고 등이 전시되어 있다.








여러 탱화들도 전시되어 있다.









기림사 전경 (1920년)









경주 기림사 건칠보살반가상(乾漆菩薩般跏像. 보물 제415호).

조선 연산군14년(1501년)에 조성된 불상으로 나무로 골격을 만든 뒤 삼베를 감고 그 위에 진흙을 바른 다음
속을 빼내어 속은 비어 있는 상태이며 불상의 겉에는 옻칠을 한 것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보기 드문 건칠불이며 높이 91cm, 너비 51cm의 크기이다.

머리에는 상투를 올렸고 그 위에는 2단 구조로 덩쿨무늬가 화려하게 새겨진 보관이 있으며
둥글고 풍만한 얼굴에는 눈, 코, 입 등이 단아하게 묘사되어 있고
양 어깨에는 천의를 걸친 모습에 목에는 세가닥의 장식이 달린 목걸이를 하고 있으며
왼손은 대좌를 짚고 다리는 대좌 아래에 내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당당한 신체의 어디에서나 조선시대 목불의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는 불상으로 얼굴 모습이나
비만한 체구에서 이국적인 조형감이 느껴져 중국 명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며 제작시기를 정확히 알 수 있고
 건칠기법을 사용하였으며 반가좌의 자세를 취한 모습 등이 이 불상의 가치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기림사 소장유물 중 국내 유일의 돌로 된 치미


치미란, 건물의 용마루 양끝에 부착한 대형 장식 기와를 말한다.

흔히 기와로 구워 만드나 기림사 치미는 재료가 돌이다.









관음전(觀音殿) 내부

기림사 관음전은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을 모시고 있는 전각이다.


천수천안(千手千眼) 관세음보살이라 함은,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과 열한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보살로 수없이 많은 중생의 고통을 보아야 해서

많은 눈이 필요하고 많은 중생을 손을 내밀어 구제를 해야하므로 많은 손이 필요하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기림사 삼층석탑(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응진전 바로 앞마당에 세워져 있으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일반적인 석탑의 형태이며 비교적 완전하게 남아있다.

아래층 기단은 대부분이 땅속에 묻혀 있고 웟층 기단의 가운데와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겼으며
 탑신부의 각 층 몸돌에는 모서리마다 기둥을 새겼고 4단의 받침을 둔 지붕돌은 경사면이 완만하다.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치켜 올려져 있으며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노반과 복발, 앙화가 완전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전체적으로 통일신라시대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나 규모가 작아져서 왜소한 외관을 이루고,
부재의 수를 간략화한 점이나 괴임과 층급받침이 형식화된 점 등이 신라말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사자상..









신자들의 간절함이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