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24> 노서동석불, 삼랑사지, 간묘, 동천사방불, 용강동고분

박태문 2018. 3. 28. 15:38




노서동석불, 삼랑사지, 간묘, 호림정, 경주의 비석, 동천사방불, 용강동고분


답사일 : 2018년 3월 20일







경주노서동석불입상(慶州路西洞石佛立像)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호

경북 경주시  노서동 156-8

 

안내판 내용에 있는 글에 의하면,


 다리 아랫부분이 땅에 묻혀 있으며 얼굴은 파손되어 모양조차 알 수 없게 되었다.

광배는 머리 둘레의 두광과 몸 둘레의 신광이 각각 2중선으로 표현되었으나

신광은 완전히 파괴되고 두광도 많이 망가져 자세히 알 수 없다.

 

몸은 비교적 세련되고 허리 위가 길게 표현 되었다.

당당한 어깨에서 가슴 일부까지 마모되어 있어서 옷은 어떻게 걸쳐졌는지 알 수 없고,

가슴부터 아래로는 비스듬한 경사를 이루면서 층단을 이루어 촘촘하게 표현되었다.

 

여기서 북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삼랑사터 당간지주가 남아있다.

삼국유사에 삼랑사 남쪽에 남항사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이곳을 남항사터로 추정하고 있다.

남항사는 신라 효소왕(재위 692-702)때 삼랑사 주지 경흥스님이 병이 들었는데,

한 여승이 11가지 보살 모습으로 나타나 해학적인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병이 낫게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노서동석불입상은 이렇게 보호전각 안에 모셔져 있다.

문헌에 의하면 본래 삼랑사 남쪽에 있는 남항사에 있었던 것이었는데

언제 누가 여기에 옮겨 놓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다.










삼랑사지 당간지주 ( 보물 제127호 )


경북 경주시 성건동 129-1번지.. 삼랑사 절의 흔적은 없지만 넓은 잔디밭에 우뚝 서 있다.










간묘 부근에 풍경이 아름답다.










경주 간묘(慶州諫墓)


경주 간묘는 신라 진평왕때의 문신인 김후직의 묘라고 전해지고 있다.

지증왕의 증손. 진평왕을 섬겨 이찬으로 병부령을 지냈다.

왕이 사냥을 즐겨 정사를 소홀히 하므로 이를 염려하여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그가 병들어 죽을 무렵 세 아들을 불러 놓고, 신하로서 왕의 잘못을 바로잡지 못하고 죽게 되니

내가 죽거든 그 시체를 왕이 사냥을 다니는 길목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뒤 왕이 사냥을 갔는데, 길가에서 사냥을 하지 말라는 가냘픈 소리가 들리므로 시종에게 물어,

그의 유언임을 알았다. 왕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는 사냥을 가지 않고 국사에 힘썼다고 한다.









경주간묘 표지석









신라중대의 충신 김후직의  묘비









호림정은, 1926년 일제강점기 안압지 동편에 지어진 정자인 임해정을

1977년 최태진 경주시장이 취임해 현재의 장소로 이건했다고 한다.









호림정은 1957년 발기해 경주지역의 사우들이 세운 사정이라고 한다.

 현재 경북지역의 중심사장의 역할을 하고 있다.


삼국유사 권 오(券 五)에 의하면 신라 원성왕 때 호랑이가 성 안에 들어와 큰 소동을 피웠으나 막을 사람이 없었다. 
김현이 흥륜사에서 탑돌이를 하다가 범이 현신한 호녀(虎女)를 만나 정을 통하였는데

그 범이 목숨을 버리면서 호랑이를 쫓아내 숲속에서 퇴치하게 된다.

 이후 김현은 그 공으로 큰 벼슬을 얻게 되었다.

 김현은 죽은 범을 위해 호원사(虎願寺)를 지어 명복을 빌었고 임종을 앞두고는 과거 호녀와의 신이한 일을 적어

 세상에 전하게 되었으며 그 책의 이름을 ‘논호림(論虎林)’이라고 했다.

논호림은 김현과 호랑이 처녀의 인연을 기록한 글로 현재 전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황성공원의 숲이 논호림으로 불렸고 논호림이라는 이 숲 이름을 딴 정자가 현재의 ‘호림정’이라는 것이다. 







사라질뻔한 이 정자를 활터로 옮겨 왔다는 것..

‘호림정의 사정을 애석히 여긴 최 시장이 3대 임두혁 회장과 협의해 주춧돌부터 기왓장, 기둥까지 수습해

호림사 전설이 담긴 바로 현재의 이곳으로 1981년 이건한 것이다.

 주춧돌이 부족해 임 회장이 서천 냇가를 헤매고 다니면서 주춧돌을 마련했다’고 ‘호림정사 편집사료’에서 기록하고 있다고 한다.

이후 1981년 반월성에서 현재위치인 황성공원으로 옮기고 1984년 사대를 건립했으며

1987년 관리사도 건립하고 1990년 잔디밭을 만들어 사장을 조성했다고 한다.










호림정 옆에는 경주에 흩어져 있던 비석 29기가 옮겨져 있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비석들..

부윤비 불망비 등이 있고, 경주 유일의 철비도 이곳에 옮겨져 있다고 한다.








황성동 황성공원 궁도장 호림정 옆의 비석들...

공원에는 김유신장군동상과 박목월시비도 있다.









비석들만 늘어선 모습이.. 쓸쓸하다.









경주 비석에 대한 설명문이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기자기한 풍경들...








경주 동천동 사방불 탑신석 (慶州東川洞四方佛構身石)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95호


직육면체 모양을 하고 있는 이 작품은

원래 탑의 중심이 되는 탑신부(塔身部)의 몸돌이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아래윗면을 제외한 4면에 부처의 모습을 새겼는데,

모두 머리와 몸으로부터 빛이 나오는 형상을 표현하였고, 각기 손모양이 다르다.

윗면에는 도드라진 연꽃무늬를 두었다.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보이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모습이라고 한다.










1만여래좌상








2만여래좌상









3만여래좌상









4만여래좌상











기단부








경주 용강동 고분(慶州 龍江洞 古墳)


 경상북도 경주시 용강동에 있는 통일신라의 무덤이다.

1989년 1월 14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328호로 지정되었다.








경주 용강동 밭 가운데에 있는 고분으로, 1986년 경주고적발굴조사단에서 발굴하여 무덤의 성격을 파악하였다.

내부는 돌방(석실)을 갖춘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도굴에 의해 피해는 입었지만 각종 토기류와 토용, 청동제십이지상이 발견되었다.


길이 12∼21cm의 토용은 홀(笏:신하가 아침에 임금에게 문안을 올릴 때 예를 갖추기 위해

두 손에 모아쥐던 패을 가진 문인상과 무인상 및 여인상이 있으며 일부는 붉은색 물감으로 채색되었다.

이들이 입고 있는 옷을 통해 당시 신라의 복식을 재현할 수 있게 되었다.

토용의 출토는 순장제도가 금지된 후 토용을 이용해 무덤에 넣은 역사적 사실을 증명해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청동제 십이지상은 각 상들이 방위에 맞게 배치되어 있는데 당나라 무덤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무덤 주인과 시대를 확인할 수 없으나, 발견된 유물들로 미루어 보아 신라 진골귀족의 무덤으로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전반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무덤 내부에서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상의 출토는 우리나라에서 처음 발견되어 신라 무덤 연구에 새로운 장을 열어주었다.

또한 신라와 당나라의 문물 교류 관계와 통일신라 복식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

(출처 : 문화재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