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21> 옥산서원, 정혜사지, 독락당

박태문 2017. 12. 14. 10:58






옥산서원, 독락당, 정혜사지


답사일 : 2017년 12월 12일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있는 서원이다. 1573년 문원공(文元公) 이언적을 모시기 위해 지어졌고, 1574년 사액을 받았다.

영남학파의 선구자인 이언적을 모신 서원인만큼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장서를 보유하고 있는 서원으로

 한국 성리학의 중심지역할을 하였다. 한석봉, 김정희, 이산해 등 당대 명인의 친필현판이 남아있다.



선조 5년(1572)에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세웠고, 그 다음해에 임금에게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다.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의 형식이다.

체인묘는 앞면 3칸·옆면 2칸으로,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하고 있는 맞배집이다.

안에는 이언적의 위패를 모셔 놓았다. 구인당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

헌종 5년(1839)에 화재로 사라졌다가 다시 지어진 건물이다. 그 외에도 정문인 역락문, 2층 건물인 무변루,

학생들의 기숙사로 동재인 민구재, 서재인 암수재 등 여러 건물이 있다.


서원 동남쪽에 1972년 후손들이 세운 청분각이 있는데,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있다. 옥산서원은 조선 후기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제외된

47개의 서원 중 하나로, 선생의 저서와 역대 명인들의 글씨와 문집이 보존되어 있다.

<출처: 대한민국 문화재청>





 초입에 새롭게 세운 옥산서원 역사자료관


옥산서원은  보물인 삼국사기 완본과 이언적의 기록물등이 있는데 이런 각종 자료들과 역사를 정리,

전시하는 공간을 초입에 별도로 마련하여 방문객들로 하여금 살펴볼수 있도록 하고 있었다.

서원을 답사차 방문한다면 역사자료관도 살펴보면 좋겠다.









1688년 5월 영남 성리학의 기틀을 닦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고향인 경주..

이언적을 모신 옥산서원으로 가는 길, 계절은 겨울이지만 따뜻한 볕에 걸음걸이도 가볍다. 










경주 옥산서원(慶州 玉山書院)


제일 먼저 서원의 살림을 맡아보던 고직사 건물들이 눈에 띈다.

소수서원, 도산서원, 병산서원, 도동서원과 함께 5대서원으로 손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옥산서원 정문인 역락문(사진 좌측)


역락문은 삼문의 형식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다.












세심대


세심대는 마음을 씻고 자연을 벗삼아 '학문을 구하는 곳'이라는 뜻이며

바위에 세겨진 글은 퇴계 이황이 쓴 것으로 전해진다.










옥계천에 펼쳐져 있는 넓은 바위인 세심대(洗心臺)

옥산서원 앞으로 자계천의 시원한 물줄기가 흐르며,

상당히 넓은 바위가 형성되어 있어 경관 또한 빼어나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이 둘러져 있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 민구재(敏求齋) 서재 암수재(闇修齋)


동재인 민구재는, 홑처마로 마감하였다. 

평면배치는 남측 1칸과 북측 2칸을 사이로 마루를 2개 두었으며, 또한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서재인 암수재는 동재와 형식이 같으며 좌우 대칭으로 자리 잡고 있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형식이며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으며, 홑처마로 마감하였다. 

평면배치는 남측 1칸과 북측 2칸을 사이로 마루를 2개 두었으며, 또한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경각


경각은 어서각이라고도 하며 문서나 책을 보관하던 곳으로, 사당의 서측 편에 위치하고 있다. 

















경각의 지붕은 홑처마로 마감하였으며, 전면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정면에 툇마루를 설치하였다.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맞배지붕에 초익공양식을 취하고 있다. 










삼문 안으로는 위패를 모신 體仁廟(체인묘)와 제사를 준비하고 제기를 보관하는 典祀廳(전사청)이 있다.











마당 한켠에 있는 불을 밝히던 정료대












옥산서원의 건물배치는 강학공간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향공간인 사당이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식인데,

다른 서원에 비해 건물이 많은 편으로, 서원의 중심 건물은 강학당(구인당)과 동재이다.











옥산서원 강학공간의 중심건물, 구인당


단정하고 절제된 모습으로 유생들이 공부하고 학문을 논했던 건물이다.

대청마루에 걸려 있는 '구인당' 현판은 조선중기 명필 한석봉이 썼다고 한다.











옥산서원 현판은 조선후기 명필 추사 김정희가 썼다고 전해진다.











문원공 회재 이언적 신도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4)은 16세기 전반기를 대표하는 성리학자이자 사림파 관료다.

이언적은 1491년 경북 경주에서 출생한 성리학자로, 1514년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사헌부지평·이조정랑 등을 역임하다가 1530년 김안로 일파에 의해 관직에서 쫓겨났다.


이후 복귀하여 경상도관찰사와 한성부판윤 등을 지내고 명종 즉위 후 좌찬성에 이르렀으나

1547년 정미사화(丁未士禍)에 연루되어 평안도 강계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중 사망하였다.

선조 초, 추숭(追崇) 과정에서 기대승(奇大升)에 의해 신도비명이 찬해졌고 1577년(선조 10)에

이산해의 글씨로 옥산서원 내에 신도비가 건립되었다.


9년 뒤인 1586년에는 손엽의 글씨로 신도비가 다시 묘소 앞에 건립되었다.

특히 옥산서원내 신도비는 이수, 귀부의 조각에서도 예술적인 가치가 있으며,

건립연대나 이언적이 차지하는 역사적 위상 등을 반영하고 있어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신도비는 건립 당시에 옥산서원 앞 계류 옆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기 위해서 서원 안으로 옯겨졌다.

신도비 모두를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였다고 한다.












제향 영역


제향영역은 제사를 지내는 공간과 이를 준비하는 공간으로, 체인문.체인묘.전사청.경각.비각 등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체인문을 들어서면 회재 이언적의 위패를 모신 체인묘가 있다.

사당은 신성한 공간이며 위엄을 갖추어야 하기에 내삼문의 주위로 담장을 둘렀다.

전사청은 제사를 지내기 전날에 제수를 보관하던 곳으로 평상시에는 제기와 제구를 보관한다.

사당 오른쪽에 있는 경각에는 어서, 어필, 내사본, 퇴계수필, 각종 전적 등을 봉안하고 있다.

사당 왼쪽에 있는 것은 선조 10년(1577)에 세워진 이언적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의 비문은 고봉 기대승이 짓고, 글씨는 아계 이산해가 썼다.

건립 당시에는 이 서원 앞의 계곡에 있었으나 훼손을 막으려고 서원 안으로 옮겼다.

(출처: 옥산서원)











무변루


공부하던 유생들의 휴식공간이 되었던 무변루

'끝이 없는 누각'이라는 뜻으로 편액의 글씨는 석봉 한호가 쓴 것이다.

처음 이름은 납청루였는데 노수신이 '스승이 남긴 뜻에 맞지 않다'며 주돈이의 '풍월무변'에서 따와 무변루로 고쳤다고 한다.

무변루는 앞면 5칸의 건물로 가운데 3칸은 넓은 대청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설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독락당에서 마을 위 300m 걸어 오르면 통일신라때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정혜사지13층석탑을 만난다.

동 시대 그 어느 탑과도 비슷하지 않은 매우 독특한 모양의 석탑이다.

정혜사지는 옥산서원을 지나 서북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 있다.










 정혜사는 신라 때의 사찰이기는 하나 창건연대를 알 수는 없다.

'동경통지'에는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원년(780년)에 당의 첨의사 백우경이 참소를 입어 이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는 뛰어난 경치터를 골라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선덕왕도 행차한 바가 있다"고 적고 있다

"후에 이것을 고쳐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한다"고 기록했다.

이 절터에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독특한 형태의 13층 석탑만 남아 있다.










정혜사지13층석탑 (국보 제40호)


이 탑은 기초 지대석의 폭이 2m이고, 탑 전체의 높이는 5.9m로서 13층으로 되어 있다.

이 탑의 특징은 처음 층을 크게 부각시키고 2층부터 줄여나가 전체적으로 안정된 조화를 보여주는 데 있다.

뿐만 아니라 2층 옥신 4면의 감실모양의 열린 공간을 설치하고 있어 기단축조에 있어서도

 전형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특수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경주 정혜사터에 세워져 있는 탑으로,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基壇) 위에 1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인데,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모습이다.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비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서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인다.

큰 규모로 만들어진 1층 몸돌은 네 모서리에 사각형의 돌기둥을 세웠으며, 그 안에 다시 보조기둥을 붙여 세워 문을 만들어 놓았다.

문을 마련해 놓은 것은 열린 공간을 추구하고자 한 의지의 표현으로 보여진다.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을 조각이 아닌 별개의 다른 돌로 만들어 놓았고, 직선을 그리던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서 경쾌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의 받침돌인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통일신라시대인 9세기 즈음에 세워졌을 것으로 추측되는 이 탑은 13층이라는 보기 드문 층수에,

기단부 역시 일반적인 양식에서 벗어나 당시의 석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비교적 옛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으며, 1층을 크게 부각시킨 후 2층부터 급격히 줄여나간 양식으로 인해

 탑 전체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출처: 대한민국 문화재청)










회재 이언적 선생의 제사를 받드는 옥산서원 뒤편에 있는 사랑채인 독락당을 찾았다.

이언적(1491∼1553) 선생이 벼슬을 그만 두고 고향에 돌아온 뒤에 거처한 유서 깊은 건물이라고 한다











獨樂堂(독락당)


회재 이언적은 함양박씨와 결혼했으나 오래도록 아들이 없어 사촌 동생의 아들 (5촌 조카 이응인)을 양자로 삼았으며,

파직후 고향에 돌아왔을때 자신의 행보가 여강(여주)이씨 전체에 미칠 영향을 우려해 부친인 성균 생원 이번(李蕃)이 살던 집인

무첨당(無添堂)으로 돌아오지 않고 독락당에서 거주했으며, 여기서 얻은 측실에게서 서자 이전인(李全仁)을 얻게 된다.

 

 

그의 소실은 늙으신 부모를 성심껏 공양했는데, 회재는 첩을 무척 아꼈다고 한다.  

후일 사람들은 이응인을 본가로 돌려보내고 서자인 이전인을 적자로 올리라고 했지만 그는 이를 거절하고,

주자가례를 고집, 가산과 학문은 양자 이응인에게 물려주었다.

 

서자 이전인은 뛰어난 학행과 효심이 남달랐으나 서자라는 이유로 이언적의 대를 잇지 못했으며

이때 나라에서는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 전쟁에서 공훈을 세우거나 군량미를 내면 서얼에게도

벼슬길을 열어주자는 주장(율곡 이이)이 있었으나 태종의 유언을 빌미로 반대하는 양반의 벽에 부딪쳐 좌절되었다.

 그러나 결국 이러한 납속 허통주장은 서얼허통의 물꼬가 되었으며 바로 이 때 이언적의 서손자이자 이전인의 아들인 이준도

납속허통을 받아 자신과 후손들의 과거 응시 길을 열었다.

 

그리하여 서자 신분으로 부사직을 역임하고 은퇴 후 고향으로 되돌아갔으나 서얼차대가 유독 심한 지역 양반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똘똘 뭉치면서 서얼들의 유향소나 서원 가입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정에서의 허통은 이루어졌지만 삶의 기반인 지역 사회에서는 거부당한 이준은

71세의 나이에 다시 청원서를 올렸지만 그의 절절한 호소는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독락당은 이언적의 서자 이전인, 서손 이준으로 이어지는 후손들이 대대로 살고 있다.

 

맹자의 진심장구 상에 나오는 "옛날 어진 선비만이 어찌 홀로(獨) 그렇지 않겠는가.

자신의 도를 즐겼고(樂)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데서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독락당은 현재 후손들이 살고 있어 무시로 드나들수가 없다











이언적 수필고본일괄(보물 586호)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안내판을 통해 알 수 있다.

 이언적의 ‘수필고본(보물 제586호)’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완본 9권 등 많은 서적이 보관되어 는 것으로 전한다.











해동명적(보물 526호)


해동명적(驪州李氏 玉山門中 遺墨 - 海東名蹟)은 조선 중종 때의 문신인 신공제(1469∼1536) 선생이

우리나라 역대 명필의 글씨가 돌에 새겨 있는 것을 탁본하여 상하 2책으로 묶은 것이다.



















































독락당은 이름 그대로 '홀로 즐긴다'라는 뜻이다.











독락당은 청록파 시인 조지훈(1920∼1968), 박목월(1916∼1978)이 젊은 날 며칠씩 묵으며 시심을 키웠다고 전해진다.

바로 이곳에서 조지훈의 ‘완화삼’, 박목월의 ‘나그네’가 무르익어 태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