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장사지, 용담정, 최재우생가
답사일 : 2017년 11월 21일
석장사지터
인근 동국대학교에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전돌을 비롯하여
다수 유물들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양지스님이 주석했던 석장사라는 사명은 바로 양지스님의 신비한 지팡이에서 유래된 것이다.
삼국유사는 스님이 석장사에 주석하면서 지팡이(석장)위에 시주할 포대를 걸어두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가 시주받을 집에 가서 스스로 흔들어 소리를 내면 그 집에서 이를 알고 시주를 하며,
포대가 다 차면 다시 그에게로 날아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양지스님이 거주한 사찰의 이름을 석장사(지팡이 절)라고 하였다고 전한다.
천도교 성지 안내도
제자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어 구미산 기슭에 안장하였으나 역적의 연고지로 지명된 이곳은 상당기간 황폐하게 방치되었다.
그러던 중 1968년 4월 현지에 있는 교인들의 성금으로 정화되기 시작한 이곳을 천도교 중앙총부에서 직접 관할하게 되었고,
1974년구미산 일대가 경주국립공원권에 편입됨에 따라 본격적인 성역화운동이 전개되었다.
1975년 2월 천도교는 구미용담성역화추진위원회를 결성하고, 거교적인 사업으로
용담정·포덕문·용담정사·성화문 등을 건립하여 성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용담정의 정문인 포덕문.
박정희 전대통령이 직접 편액의 글을 썼다고 한다.
포덕문 안쪽에 세워진 수운 대신사 동상
포덕관
천도교 수도원
용담정 내부에는 수운 영정을 모셨고 그 왼쪽 벽에 후학들에게
수련함에 있어 조바심을 내지 말라는 뜻에서 써주었다는 친필 ‘龜’자가 걸려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경주시내에서 북동쪽으로 10㎞쯤 떨어진 구미산 자락에 앉은 용담정
7평 남짓 크기의 아담한 단층 목조 건물이지만 천도교 1세 교조인 수운 최제우(1824∼1864)
대신사(大神師)가 득도해 동학 천도교를 일으킨 천도교의 발상지이자 최고 성지이다.
지금은 교적 교인 10만명에 불과한 군소 종단으로 쇠락했지만
1919년 3·1만세운동이 있었던 무렵엔 교인이 300만명이나
됐을 만큼 번창했던 민족종교 천도교. 그 대표 성지인 용담정엔 역사의 숨결과
민족혼을 느끼려 찾아드는 교인은 물론 일반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사각정 용추각(龍湫閣
늦가을과 더블어 용추각의 아름다운 모습
수운 최제우 생가에 세워진 유허비
박정희 전대통령이 제자(題字)를 했다.
서운 최제우 선생 생가
용담에서 난 최제우는 장년이 되어 제세안민(濟世安民)의 도(道)를 찾고자 10여 년간 전국을 순회하다가
가산만 탕진하고 뜻을 이루지 못하자, 착잡한 심경으로 다시 용담정으로 돌아와 각도에 전념하였다.
그러던 중 1860년 4월 5일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한울님의 계시를 받아 무극대도를 이루었다.
그는 〈용담가〉를 지어 이 득도의 과정과 내용을 서술하였는데, 〈용담가〉라는 가사의 명칭은 용담정의 이름을 딴 것이다.
수운 선생은 경주지역 몰락양반으로 태어나 무극대도의 깨달음을 얻은 후 1860년 민족종교인 동학을 창시했으며,
이후 양산의 천성산에서 기도하며 수도하던 중 득도해 자신의 도는 천도요, 학은 동학이라 했다.
옛 것이 주는 마음의 평안이 좋다.
경주시는 동학의 창시자인 수운 최제우 선생의 생애와 동학사상을 조명하고 동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볼거리를 제공해
우리 민족의 사상적 긍지를 제고하여 민족 주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2012년 11월부터 생가복원사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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