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장골의 유적
(황금대, 바둑바위, 금오봉, 지바위골마애불, 삼화령, 용장골)
답사일 : 2017년 10월 28일
금오봉 오르는 길, 심하게 훼손된 석상 발견..
남산의 최고봉은 고위봉이지만 중심이 되는 봉우리는 금오봉이다.
그래서 남산을 금오산이라고도 부르는데 이곳은 냉골, 포석계, 지바위골, 비파골, 약수골 등의 분수령이 된다.
황금대
바둑바위
바둑바위는 거의 남산 정상부위에 있지만 100명은 충분하게 들어설 수 있을 만큼 넓어
남산을 오르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곳에서 땀을 훔친다. 조망이 시원하다.
삼화령
삼화령은 '삼화수리'라고도 하는데 수리는 높은 곳을 의미하며 남산에는 세곳 수리가 있는데 금오봉과 고위봉,
그리고 두 봉우리의 삼각형 위치에 해당하는 이 곳 봉우리를 합하여 삼화령이라 불렀다.
삼화령(三花嶺)은 신라 시대의 화랑(花郞)이 기예를 닦던 장소이자, 미륵 사상이 융성했던 곳이다.
선덕여왕시절 생의스님의 꿈에 한 노승이 나타나 '나를 따라오라'하며 남산 남쪽 골짜기에 데리고 가서 풀을 묶어 놓으며
"내가 이곳에 묻혀 있으니 나를 파내어 고개위에 안치 해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 그곳에 가 보았더니 꿈속처럼 풀을 묶어 놓은 곳이 있었다.
생의스님은 땅을 파 미륵불을 발견하고 삼화령 꼭대기에 모셔놓고 그 자리에 절을 지어 공양하였다.
또한, 이 곳이 미륵의 성지였음을 밝혀주는 설화가 『삼국유사』에 전한다.
3월 3일에 경덕왕이 신하들과 함께 귀정문의 누각에 나가서 이르기를, 뜻과 예절을 갖춘 승려를 데려 오라고 하였다.
이 때 검소한 옷을 입은 승려 한 사람이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은 그를 보고 기뻐하며 누각 위로 불러 영접하였다.
승려가 들고 있는 삼태기 속에는 다구만이 가득하였다. 왕이 그 이유를 물으니
“소승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의 미륵 세존께 드리는데 오늘도 차를 드리고 오는 길입니다.”라고 하였다.
이로써 삼화령이 미륵불과 인연이 있는 곳임이 밝혀졌으며, 경주 남산성 부근에서 삼화령과 관련된
석불 3존이 발견되어 현재 국립 경주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미륵 세존이 있었다는 삼화령의 위치와
석불 3존에 대한 존명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아 이를 추측하는 다른 의견들이 나오고 있다.
삼화령의 흔적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慶州南山茸長寺谷石佛坐像]
보물 제187호. 총높이 456㎝, 상높이 141㎝. 특이한 3층석탑 형식의 대좌 위에 놓여 있는 좌상으로
몸과 대좌가 하나의 돌로 만들어졌으며 머리부분은 없어졌다.
통견의 법의는 조각이 선명하며 가슴에는 내의의 깃과 이것을 묶는 띠매듭이 굵게 표현되어 있다.
왼쪽 어깨에 있는 또 하나의 띠매듭은 가사를 묶는 것으로 대개 승려형의 상에서 표현되는 특징이다.
결가부좌의 자세로 앉아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오른쪽 무릎 위에 올려놓고 왼손은 왼쪽 무릎 위에 얹어 놓았다.
형식적인 옷주름은 방형의 대좌를 덮는 상현좌를 이루고 있는데 3단으로 되어 좀더 도식화된 경향을 보여준다.
좌상 밑의 대좌는 이형3층탑(異形三層塔)이라고 생각될 만큼 특이한데 기단부는 자연석이고 제일 높은 상대에는 앙련이 조각되어 있다.
왼쪽 어깨의 가사 띠매듭과 자연스러운 손 모양에 의해 승형(僧形)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고,
〈삼국유사〉 권4 현유가(賢瑜珈)조에 보이는 '자씨석장육상'(慈氏石丈六像)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이 상은 전체적으로 대좌에 비해 불상이 작은 편이지만 세련되고 긴장감 넘치는 사실주의적인 면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출처: 다음백과)
원반 모양 세 돌받침 위에 부처를 모신 모양이 특이하다.
용장사터
용장사는 매월당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쓰며 머물던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현재 몇 군데의 석축이 남아있어 절터였음을 짐작케 해줄 뿐이다.
계곡 아래서 올려다 본 용장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186호)
금오봉 정상을 찍고 남산 계곡 중에 가장 깊고 큰 계곡인 용장골로 내려가면
매월당 김시습이 세속을 버리고 은둔하며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金鰲神話)를 집필한 곳으로 알려진 용장사지다.
하지만 가파르기 그지없는 바위 절벽에 터를 잡았던 용장사는 흔적도 없고 그 빈터에는 삼층석탑과 삼륜대좌불, 마애불만이 남아 있다.
산 중턱에 우뚝 솟은 삼층석탑은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삼층석탑으로 거대한 바위산 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고
그 위에 이층기단을 쌓은 뒤 삼층의 탑신과 옥계석을 얹어 놓았다.
4.5m의 석탑 바로 아래는 아찔한 절벽이고 깊은 계곡인데, 계곡 아래서 보면 마치 하늘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용장계 사곡 제1사지 약사여래좌상
법당터 한가운데 남향으로 앉으신 이 불상은 1940년에 산에서 흘러온 모래와 자갈돌에 묻혀 있었던 것을 발굴 조사한 것인데,
머리와 꽝배는 찾지 못하고 대좌와 몸체만 발견되었다.
불상은 결가부좌로 앉아 왼존에 약 그릇을 들고 오른손은 촉지안상을 나타내어 약사여래임을 나타내고 있다.
조강의 선은 부르럽고도 유려하게 흘러내리고 있으며,
신체에 탄력이 없는 것으로 보아 9세기에 조성된 것을 알 수 있다.
삼단으로 된 이 불상의 대좌는 불상 아래에 묻혀 있으며,
남산에서 셋 밖에 없는 희귀한 네모난 대좌이다.
축대 아래에는 석탑 옥개석이 1개 굴러 떨어져 있다.
<안내문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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