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5> 서악서원, 서악동고분군, 김유신묘

박태문 2017. 11. 7. 12:29




서악서원, 서악동고분군(진흥, 진지, 문성, 헌안) 김유신묘


답사일 : 2017년 10월 31일








서악서원 (西岳書院 ) 외삼문(입구)의 모습


경북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조선후기 서원. 경상북도기념물 제19호.

1651년(효종 2) 이정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설총, 김유신,최치원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서악서원 시습당(강당)


1561년(명종 16) 이정(李楨)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김유신(金庾信)의 위패를 모시며 창건하였고,

1563년(명종 18) 신라의 문장가 설총(薛聰)·최치원(崔致遠)의 위패를 추가 배향하였다.

처음은 선도산(仙桃山) 아래 서악정사(西岳精舍)로 창건하여 향사를 지내오다가,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1600년(선조 33) 서원터의 초사(草舍)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1602년 묘우(廟宇)를 신축하고 1610년 강당과 재사(齋舍)를 중건하였다.

1623년(인조 1) ‘西岳(서악)’이라고 사액되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이며,

1873년에 중수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5칸의 시습당(時習堂), 5칸의 절차헌(切嗟軒), 5칸의 조설헌(譟雪軒), 영귀루(詠歸樓),

3칸의 전사청(奠祀廳), 4칸의 고자실(庫子室), 도동문(道東門)·외문(外門)·내문(內門) 등이 있다.


묘우에는 설총·김유신·최치원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강당인 조설헌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시습당과 절차헌은 유생들이 공부하며 거처하는 곳이고, 영귀루는 누각이며,

전사청은 향례 때 제수(祭需)를 마련하여 두는 곳이고, 고자실은 고자들이 거처하는 곳이다.

이 서원에서는 매년 2월 중정(中丁: 두번째 丁日)과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제품(祭品)은 7변(籩) 7두(豆)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물로는 문집 몇 권이 있다. 재산으로는 대지 1,100여 평, 답 3,600여 평, 임야 3,400평 등이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서악서원을 창건한 龜巖 李楨 비각











서악서원 묘우(사당)


사당은 앞면 3칸에 맞배지붕을 하고 있는데, 다른 곳에 비해 웅장하게 지어졌다.

삼국통일에 큰 공을 세운 김유신과 유학자인 최치원과 설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


조선 시대의 야담집 《천예록(天倪錄)》에는 서악서원이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던 때를 배경으로 한, 김유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있다.

김유신과 설총, 최치원 세 사람의 위패를 모두 모신 경주의 서악정사가 비로소 조정으로부터 사액을 받게 되었을 때,

경주의 유학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어떤 서생이 설총은 중국의 유교 경전을 이두로 풀이하여 가르친 공적이 있고,

최치원은 문장으로 중국에까지 이름을 떨친 공적이 있지만, 김유신은 신라의 일개 무장(武將)으로서 유학자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일을 한 것이 없다며 먼저 김유신의 위패를 서원의 제사에서 뺀 다음에 조정의 사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데 얼마 뒤, 서생이 서원에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옷을 입은 무사들이 서생의 머리채를 잡고 서원 뜰에 꿇어앉히고,

사방에 무기와 갑옷을 갖춘 병사들이 벌여 선 가운데, 김유신이 나타나 서생을 향해 "유학자들이 중히 여기는 덕목이 충(忠)과 효(孝)가 아니던가.

내가 살아서는 위태로운 나라를 위해 전장에 나아가 어려움을 구제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공을 세웠으니 그것이 충이고,

공을 세우고 입신양명하여 내 집안과 부모의 이름을 빛나게 했으니 그것이 효인데,

네까짓 놈이 어찌 함부로 이야기하느냐."라며 호통을 치는 것이었다.

깨어난 서생은 두려워하며 시름시름 앓다가 이틀만에 피를 두 말이나 토하고 죽고 말았다.

(출처: 문화재청)










사당에 코끼리인 듯 그려진 동물모양이 특이하다. 












영귀루

영귀루에 올라서는 경주 도심풍경이 한 눈에 볼 수 있다. 

보통 서원 입구에 있는 누각은 서원을 내방하는 손님 접대 장소나 서원에 참여한 임원들의 풍류 장소,

혹은 유생들의 회합 장소로 사용되었다.

이 영귀루는 정면 5칸에 측면 1칸의 2층 형태로 지어졌다.












경주의 서쪽을 지키는 산, 서악으로 불렸던 선도산 자락에는 많은 문화유적과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본래의 이름과 다르게 알려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이 있기도 하지만 지금도 새롭게 감추어졌던 모습을 드러내는 진행형 역사현장이다. 




서악동 삼층석탑


 무열왕릉-진흥왕릉-진지왕릉-문성왕릉-헌안왕릉 으로 이어지는 이 곳 서악동 문화재 주변에 구절초가 풍성하다.
 원래는 대나무와 아카시아로 시야가 가려져 있었는데 신라문화원 문화재돌봄사업단(대표 진병길)이 문화재청과 경상북도 지원으로

지난 2011년과 2012년 비지정고분군 30여기와 탑의 시야를 가리고 있던 대나무, 아카시아 뿌리를 제거하면서부터라고 한다.

해마다 계절마다, 국화와 작약, 연산홍 등을 심어 보물인 서악동삼층석탑과 왕릉 및 도봉서당이 어울리는 멋진 경관을 조성하고 있다고 한다.











석탑뒤의 묘는 누구의 능인지 밝혀지지 않아 그저, 고분군에 속한다.










서악동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것임에도 외관이 깨끗한데

근래에 와서 세척작업을 했다고 한다..










석탑과, 고분 그리고 구절초와 소나무의 어우러짐이 아름답다.













선도산 주상절리


무열왕릉에서 선도산으로 이어지는 등산길로 300여m 오르다 계곡으로 진입하면 신비스런 모습의 주상절리 암벽이 나타난다. 

천연기념물로 등재된 경주 양남의 주상절리군과는 다르게 육상에 위치하며 크기가 어른 주먹크기, 

 팔뚝크기의 사각, 오각, 육각기둥 등 다양하며 하늘을 향해 서거나, 장작더미처럼 누워있기도 하고

거북등무늬로 땅에 누운듯 박혀있기도 해서 아주 이색적이다..









이색적인 모습이다.











이 곳 주상절리 비경은 선도산 인근의 무열왕릉과 서악서원, 도봉서원, 삼층석탑, 성혈, 진흥왕과 진지왕릉,

마애삼존불 등의 문화유적과 연접해 있어 이곳을 탐방하는 방문객들의 발길은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형성된 연대가 오래전이어서 화강암이 이미 풍화작용을 거쳐 쉽게 부서지는 시기에 접어들었기에

방문객들이 손으로 만지는 것만으로도 훼손될 수 있는 실정이다.
일부 뜯기어진 바위 일부에는 고사리화석암 등의 희귀한 돌도 발견되고 있어 보호대책은 시급하다고 한다.

‘문화재의 보고’ 경주지역에 수많은 문화재가 산재해 있는 만큼 방치해 두지만 말고 관심을 갖고 보존에도 신경을 써야할 듯 하다.








 



황정의 묘


 저경() 10m, 높이 3m의 타원형 봉토분으로 앞쪽에 문인석, 무인석, 상석, 혼유석(), 묘갈 등이 놓여 있다.

묘갈 전면에는 '통훈대부시강원찬독불권헌황선생지묘()'라는 명문이 있으며

뒷면에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묘 아래쪽에 황정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세운 도봉서당(:경북문화재자료 제497호)이 있다.

황정은 조선 성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사간원정언, 승문원교리, 삼남도 도사 등을 지내다가 연산군 때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출처: 두산백과)










경주 헌안왕릉 (慶州 憲安王陵)

사적 제 179호


신라 47대 헌안왕(재위 857∼861)의 무덤이다.
헌안왕은 본명이 김의정으로, 45대 신무왕의 이복동생이다.

 재위기간 동안 특별한 치적은 없으나 제방을 수리하는 등 농사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861년 1월에 왕이 죽자 시호를 헌안이라 하고 공작지에 장사지냈다고 하였으나 공작지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무덤의 형태는 가장 단순한 형식의 무덤으로 높이 4.3m, 지름 15.3m의 원형 봉토분이다.

밑둘레에는 자연석을 이용하여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 몇 개만이 남아 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정된다.

※(신라헌안왕릉 → 경주 헌안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문화재청)











헌안왕은 아들이 없고 딸들만 있었다고 한다.
헌안왕은 평소에 신하들에게 “우리나라에 여왕이 있었지만 이는 본받지 못할 일”이라며

“사위 응렴이 어리지만 노련하고 성숙한 덕이 있으니 왕으로 세워 섬기도록 하시오”라고 하였다.
왕은 희강왕의 손자 아찬 계명의 아들 응렴을 사위로 삼고 그에게 왕위를 잇게 했던 것이다. 
응렴이 헌안왕을 이어 48대 경문왕이 되었지만 많은 반란이 일어나 어려움을 겪으면서

왕권은 쇠약의 길을 걸었다고 전해진다.













경주 진지왕릉의 안내표지판













경주 진지왕릉 ( 慶州 眞智王陵 )

(사적 제517호)


문성왕릉과 분리하여 재지정하였다.

진지왕은 진흥왕의 둘째 아들로 왕비는 지도부인이며, 무열왕은 진지왕의 손자이다.

거칠부를 상대등으로 삼았으며, 진흥왕의 뜻을 받들어 내리서성을 쌓고 백제군을 격퇴하였다.

또한 중국 진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다.

진지왕릉은 호석으로 추정되는 괴석의 일부가 봉분에 노출되어 있으며,

봉토 및 주변에는 잔디를 식재하여 토사유실을 방지하고 있다.

봉분 정면에 표석 1기와 문화재안내판이 설치되어 있으며, 봉분 남동쪽으로 길이 32m의 석축이 만들어져 있다.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출처: 문화재청)











경주 진흥왕릉 ( 慶州 眞興王陵 )

(사적 177호)


현재 몇 개만이 남아있다. 내부는 굴식돌방무덤(횡혈식석실묘)으로 추측된다.

왕 중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의 무덤으로서는 규모가 작은 편이며, 기록상 법흥왕과 같은 곳에 있어야 하므로

서악동 무덤들 중 위에서 두 번째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신라진흥왕릉 → 경주 진흥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출처: 문화재청)











진흥왕릉의 곡선..













진흥왕릉의 안내표지판











경주 문성왕릉 ( 慶州 文聖王陵 )

(사적 제518호)


일제시대 고적으로 관리하여 오던 것을 1963년 사적으로 일괄 지정하였으며, 2011년 진지왕릉과 분리하여 재지정하였음.

문성왕은 신무왕의 아들로 신라의 쇠퇴기에 재위하였으나 청해진대사 장보고의 난을 평정하고 혈구진을 설치하여

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 한편 임해전을 크게 보수하였다.

봉분에는 호석이나 상석 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남측에 1기의 표석이 설치되어 있고, 그 아래로 문화재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봉분 주변은 소나무로 둘러싸여 있다

(출처: 문화재청)












문성왕릉 안내표지판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 비


이 비석은 신기하기로 알려져 있다.

비가 오거나 물이 묻으면 '왕릉'이란 글자 중에 '릉(陵)이 묘(墓)로 변한다.

그것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들이 비석에 물을 부어 물에 젖어 있는 모습이다.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김유신(金庾信, 595년 ~ 673년)장군의 묘


 김유신은 신라군인정치가이자, 외척이었다. 신라에 귀순한 가야 왕족의 후손으로서, 신라백제고구려를 무너뜨리고

삼한일통을 이루는 데에 중추적인 역할을 한 신라의 장군이며, 정치가이다.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문무왕(文武王)을 도와 신라의 삼국 통일 전쟁을 보좌하였으며,

진평왕(眞平王)부터 문무왕에 이르는 다섯 명의 왕을 섬겨 신라 정권의 중추적 인물로 성장하였다.

신하로서 왕으로 추봉된 유일한 인물이며, 무열왕의 즉위 및 삼국 통일 전쟁 등에 기여한 공적을 인정받아

왕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순충장렬흥무대왕(純忠壯烈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신라의 역사에서뿐 아니라 후대 고려조선에 이르기까지 성신(聖臣)·주석지신(柱石之臣)으로 추앙받았다.











김유신 장군묘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신비스럽고 아름답다. 

직경 30m나 되는 묘의 웅장함과 신라의 여느 왕릉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김유신장군묘를 보면 이곳이 과연 장군의 무덤인가 싶을 정도다.

병풍처럼 둘러진 둘레돌과 둘레돌에 조각된 정교한 십이지신상 또한 인상깊다.

가지 왕릉과 다른 점이 있다면 왕릉에 새겨지는 십이지신상은 능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있는 반면

김유신장군묘에 새겨져 있는 십이지신상은 한복차림의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다는 점이다.












김유신의 묘에 대해 문화재청을 이렇게 기록한다.


경주 송화산 동쪽 구릉 위에 자리잡고 있는 신라 장군 김유신의 무덤. 

김유신(595∼673)은 삼국통일에 중심 역할을 한 사람으로, 김춘추(후에 태종무열왕)와 혈연관계를 맺으며

정치적 발판을 마련하였고, 여러 전투와 내란에서 큰 공을 세웠다.

 660년에 귀족회의의 우두머리인 상대등이 되어 백제를 멸망시켰으며, 668년에는 신라군의 총사령관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의 침략을 막아 신라 삼국통일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의 비만 남아있다.










                                   

 자(子 : 쥐)                                                               축(丑 : 소)



                                   

인(寅 : 호랑이)                                                          묘(卯 : 토끼)



     

진(辰 : 용)                                                              사(巳 : 뱀)



     

오(午 : 말)                                                               미(未 : 양)



     

신(申 : 원숭이)                                                        유(酉 : 닭)



      

술(戌 : 개)                                                               해(亥 : 돼지)



   호석(護石)은 무덤 외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돌로 만든 시설물로서 열석(列石)이라고도 한다.

십이지를 상징하는 수면인신상(獸面人身像) -  쥐[子]·소[丑]·범[寅]·토끼[卯]·용[辰]·뱀[巳]·말[午]·

양[未]·원숭이 [申]·닭[酉]·개[戌]·돼지[亥] 등 12동물은 수호신장으로 김유신 장군의 무덤을 지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