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3> 효현리삼층석탑, 법흥왕릉

박태문 2017. 10. 20. 13:03




효현리삼층석탑, 법흥왕릉


답사일 : 2017년 10월 17일







 

효현리 삼층석탑 (보물 제67호)

 

탑이 세워진 이 터는 신라 법흥왕이 죽기 전까지 승려로서 불도를 닦았다는 애공사(哀公寺)가 있었던 곳이라

전해오기도 하지만 주변이 논밭으로 변하여 사찰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탑은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모습이다.

기단은 사방 네 면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두었는데, 탑신에 비해 과중한 비율을 보이고 있어 무거운 느낌을 준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을 본 뜬 조각을 두었고, 지붕돌은 하늘을 향해 네 귀퉁이가 살짝 들려있어 경쾌한 곡선을 이룬다.

지붕돌의 밑면 받침이 4단으로 되어있고 각 부분의 조각이 가늘고 약하게 나타나 있어 9세기 무렵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효현리 삼층석탑은 법흥왕릉 가는 길에 위치해 있다. 

 이 탑은  화강암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중기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법흥왕릉 (사적 제176호)

 

 이 능은 신라 제23대 법흥왕(재위 514~540)을 모신 곳이다.

봉분은 지름 약 14m, 높이 약 4.2m이며, 흙으로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크기는 다소 작은 편이며무덤 아래에는 둘레돌을 받쳤던 자연석이 있다.

 법흥왕은 지증왕의 맏아들로서, 처음으로 병부를 두고 율령을 반포하였으며,

상대등을 설치하는 등 신라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는 기초를 세웠으며,

금관가야를 합병하여 낙동강 유역으로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혔다.

 

또한 건원이라는 신라 최초의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

법흥왕 15년에는 불교를 공인하여, 국교로 정하고, 신라 최초의 사찰인 흥륜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삼국사기에 "애공사 북봉에 장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에도 "능은 애공사 북쪽에 있다"고 하여 무덤의 주인공을 밝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법흥왕 이후의 능은 구릉이나 교외에 따로 자리하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의 시작이 법흥왕릉에서 찾아 볼 수 있어 중요한 곳이다.

 

 


 





법흥왕릉은 수많은 대소고분이 밀집되어 있는 경주시내의 평지고분군을 벗어나서 교외의 야산 구릉지대에 축조되었다.

비석이 없다면 왕의 무덤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만큼 소박하고 단아한 모습이다.

 


 

 

 



 



울창한 소나무 사이에 자리한 법흥왕릉..

 입구의 소나무가 서로 마주보며 기울어져 있어서 마치 대문 역할을 하는 듯하다.

 



 






 

법흥왕릉 표석비

 

法興王(법흥왕)은 신라의 제23대 임금이며,
성은 金(김)이고 이름은 原宗(원종)이다.
그의 아버지 지증왕과 延帝夫人(연제부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