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2> 냉골과 선방골

박태문 2017. 10. 20. 10:13




냉골과 선방골

(배리삼존불, 냉골, 망월사, 경애왕릉, 상선암, 상사바위, 지마왕릉)


답사일 : 2017년 10월 14일









배리삼존불 (보물 제63호)

 

조각솜씨가 뛰어나 7세기 신라 불상조각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이 삼존불은

남산 기슭에 흩어져 있던 것을 1923년 지금의 자리에 모아 세웠다 한다.




 


 






보호각을 피해 담아본다.


대세지보살상(좌) : 삼존불 가운데 가장 섬세한 조각성을 띈다.

어깨부터 발등까지 구슬과 꽃송이로 엮은 목걸이를 하고 있다.

제작시기는 삼국말기인 7세기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고 한다.


아미타불상(가운데) : 손바닥을 정면을 향하도록 편 모양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고

원하는 바를 달성케하며 고난을 해소시키는 덕(德)이라고 한다.


관세음보살상(우) : 당당하고 위풍스런 느낌으로 머리에 보관을 쓰고 미소를 띠고 있다.

 


 






삼불사 가는 길에..


남산 어느 길을 가던지 불심이 가득하다.

바닥에 드러누운 바위도 갑자기 부처가 된다.

경주는 노천박물관이기 이전에 서라벌인 것이다!






삼릉계(삼릉곡)은 계곡이 깊고 여름에도 찬기운이 돌아 냉골이라고 부른다.

11개소의 절터와 15구의 불상이 산재하여 남산에서 가장 많은 유적이 있으며

 금오봉 정상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찾는 사람들이 많다.









 

삼불사 경내에 있는 모듬탑


옥개석이 4개, 옥개석도 층급받침이 3단, 4단으로 각기 다르다.

적어도 3개의 탑 부재들을 모아서 만든 모듬탑으로 추측한다고 한다.

오층탑도 아닌 삼층탑도 아닌, 탑의 정체성을 잃어

오랜 역사지만 문화재로 인증받지 못하고 있다.









다른 방향에서도 담아본다..











경주시 배동에 자리한 대한불교원효종 사찰, 망월사(望月寺)










망월사 전경









초석에 고인 물은 하늘을 담고, 계절을 담는다.









 

 구각연당에 세워진 삼층석탑


이 탑 역시 두개 이상의 탑 부재를 모아 만든 탑인데

층급받침에 연화문이 있어 연화탑으로 불리운다고 한다.

특이하게도 연못위에 탑이 세워져 있다.

삼불사 탑과 마찬가지로 통일신라시대의 탑 형식이나 양식이 맞지않아

문화재 인증이 될 수 없는 탑이라고 한다.

 


 








        경애왕릉(景哀王陵)

   이 능은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 재위 924~927)을 모신 곳이다.
밑 둘레 43m, 지름 12m, 높이 4.2m 규모로 흙을 둥글게 쌓은 형태이다.

   왕은 제53대 신덕왕(神德王)의 아들로 927년 포석정에서

잔치(연회)를 베풀고 있을 때 후백제 견훤이 강제로 자살시켰다고 전해진다.

경애왕 다음으로 왕위에 오른 경순왕은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










경애왕릉의 무덤은 삼릉계곡 입구의 소나무 숲안에 자리하고 있으며

신라왕릉으로는 아주 작은 규모로 별다른 특징은 없다.









 

경주 남산 입곡 석불두 (삿갓골석불입상)


삿갓골석불입상의 윗부분. 허리부분, 좌대

 

삿갓골석불입상은 신라 최성기 남산 석불의 대표작으로 꼽을 수 있으며  

머리와 가슴 부분, 허리 밑 부분, 대좌의 세 부분으로 남아 있는 석불입상이다.

비록 여러 부분으로 깨어져 있지만 다행히 상반신이 완전하고 광배와 연화대좌가 남아 있어

신라 최성기의 남산 조각 양식의 단면을 보여주는 수작으로서 통일신라시대 전성기 때인 8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입곡 석불두는 언제 파괴되었는지 모르지만  머리와 가슴 부분 그리고 상체에 붙어 있는 광배(光背)와

불상의 좌대 만 남아 있었는데 후에 무릎까지 남아 있는 하반신이 발견되어 1997년, 상반신과 하반신 일부

그리고 대좌를 한곳에 모아 지금처럼 시멘트 받침 위에 올려놓았다.

 

 

 

 



 

 

근세까지 땅에 묻혀있어서 옷주름이 생생하기 그지없으며

특히 가사와 군의를 매듭지은 수실은 신라때부터 매듭이 있었다는 복식사적으로도 중요한 단서가 된다고 한다.

머리부분은 아직 발굴되지 않았다는..

 







 

삼릉곡 제2사지 석조여래좌상


높이 1.6m 너비156m의 큰 불상이다.

앞 계곡에 묻혀 있다가 1964년 발견되어 옮겨 놓은 것이기 때문에

마멸이 없고 옷주름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가슴에 매듭이 사실적으로 새겨져 있어

전통매듭이 신라시대부터 장식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와 두 무릎 수인이 파괴되어 어떠한 불상인지 알 수 없게 되었으나

편안히 앉은 자세, 탄력있는 가슴, 넓고 당당한 어깨 등

8세기 중엽 통일신라 전성기의 위풍당당한 불상이다.


문화재로 지정받지도 못한 채 등산로 한쪽 모퉁이에 유지되고 있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우뚝 선 바위에 선명한 마애관음보살상, 통통한 얼굴윤곽이 인상적이다.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높이 1.5m.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호.

경주 남산 서쪽 사면의 삼릉계곡에 있는 큰 바위의 윗부분을 쪼아내어 부조한 관음보살상이다.

전체 윤곽이 광배(光背) 형태로 마무리되어 있으며, 오른손은 들어 가슴에 대고, 왼손은 내려 정병(淨甁)을 든 모습이다.

얼굴과 몸의 윗부분은 비교적 고부조로 입체감이 있게 표현되었으나, 허리 아래 부분은 윤곽이 불분명하고 표면이 거칠며,

왼쪽 다리 옆의 정병만 고부조로 표현되어 확실한 윤곽을 드러내고 있다.

머리에 보관(寶冠)의 표현은 없고, 육계(肉髻)처럼 솟아오른 민머리[素髮]이다.

입이 작고 입 끝을 살짝 오므려 미소짓고 있는 얼굴은 비교적 길고 통통하여 자비스러운 모습이다.

천의(天衣)는 왼쪽 어깨에서 가슴을 비스듬히 지나면서 넓게 도드라져 있다.


하체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가 허리에서 무릎 바로 위까지 늘어져 있고,

양 다리에 각각 U자형 주름이 새겨져 있는데 선각(線刻)에 가깝게 표현되어 있다.

천의가 입혀진 형식이나 손바닥을 앞으로 내보이면서 정병을 들고 있는 손모습은

통일신라 8세기 관음보살상의 전형적인 표현인 경주의 굴불사지사면석불(掘佛寺址四面石佛) 중

서쪽면의 왼쪽 관음보살상이나 칠불암마애삼존불(七佛庵磨崖三尊佛) 중의 정병을 든 보살상 등과 유사하며,

불상의 비례와 착의법(着衣法), 그리고 지물(持物) 등 에서 8세기 후반경의 제작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발췌>


 




 


 

 삼릉계곡 마애관음보살상 표시석도 담아본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유형문화재 제21호)


자연 암벽의 동서 양벽에 각각 마애삼존상을 선으로 조각한 6존상으로, 그 조각수법이 정교하고 우수하여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으뜸가는 작품으로 꼽히고 있다.







 


  

삼릉계곡 선각육존불

 

오른쪽 삼존상의 본존은 석가여래좌상이며, 그 좌우의 협시보살상은 온화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향하여 서 있다.

왼쪽 삼존상의 본존 역시 석가여래로서 입상이며, 양쪽의 협시보살상은 연꽃무늬 대좌 위에 무릎을 꿇고 본존을 향해 공양하는 자세이다.

이 2구의 마애삼존상은 만들어진 시대나 조각자가 정확하게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대체로 통일신라시대로 추정되며,

오른쪽 암벽의 정상에는 당시 이들 불상을 보존하기 위해 법당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안내판을 보면 불상의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삼릉계곡 선각여래좌상(지방유형문화재 159호)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삼릉계곡에 있는 높이 10m가량 되는 바위에 새겨진 앉아 있는 모습의 여래상이다.

이곳은 신라 아달라왕, 신덕왕, 경명왕의 큰 무덤이 있어서 삼릉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서쪽을 향하고 있는 불상은 몸은 모두 선으로 그은 듯이 새기고 얼굴만 도드라지게 표현한 독특한 조각수법을 보이고 있다.

이 불상은 고려시대에 새긴 것으로 추정되며 이런 유형의 불상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출처:문화재청)



 

 




 

근접하여 보니 단순하면서도 소박한 모습이다.

단순한 선의 미와 전체적으로  균형과 안정감이 드는 모습이

그림을 그려놓은 듯  친근감이 든다.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666호로 화강암조각한 것이다.

머리는 골짜기에 떨어져 있었고, 불신은 앞으로 광배는 뒤로 쓰러져 있던 것을 1923년에 보수하였다.

이때 이미 코 이하의 얼굴 부분은 손상을 입었는데, 그 뒤에 시멘트로 엉성하게 보충하여 얼굴이 매우 부자연스러웠다.

최근에 시멘트 보수를 새롭게 하여 자연스럽게 되었다.

얼굴은 원만하며, 두 귀는 짧게 표현되었다. 우단편견(왼쪽 어깨에만 걸쳐 입은 옷)의 옷주름 선은 간결하고 아름답다.

허리는 가늘고 앉은 자세는 안정감이 있다. 대좌(臺座)는 상·중·하대로 구성되었는데,

상대에는 화려한 연꽃무늬를 조각하였으며, 8각 중대석 각 면에 간략하게 눈 모양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다.

하대는 단순한 8각대석이다.










상선암


상선암은 옛 절터에 90여 년 전 세워진 사찰이다.









삼릉곡 제9사지 선각보살상


상선암 뒤쪽 부서진 바위에 하반신만 선각으로 남아 있는 조각이 있는데,

화려한 옷주름과 구슬. 리본 등이 새겨져 있어 보살상임을 알 수 있다.

완전하다면 5m정도 되는 큰 상으로 9세기에 조성된 보살상이라고 한다.







 

선각보살상

 




 




 

 삼릉계곡 마애석가 여래좌상


자연 암반의 벽면에 6m 높이로 양각된 불상이다.

남산에서 두 번째로 큰 불상이라고 한다.

 1982년 2월 24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158호로 지정되었다.









 

상사바위 근처에서 바라본 마애석가 여래좌상








 

 신라때 아기를 원하던 사람들이 빌었다던 '산아당'

바위에 칼자국과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상사바위 아랫부분에는 아예 기도를 위한 제당을 만들어 놓고 무속행위를 하기도 한단다.








 

상사바위


삼국유사에 상사병이 걸린 사람이 기도하면 낫는다고 기록돼 있어 지금도 기도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고 한다.

"상사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그 크기가 백여 발이나 되는데

그 생김새가 가파르게 솟아 있어 오르기가 어렵다.

상사병에 걸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위하고 빌면 병이 낫는다."

"산아당(産兒堂)은 금오산에 있는데 아기를 낳는 모습을 돌에 새겨놓았다.

신라 때 아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빌던 곳이라 전하는데

가위와 칼자국이 남아있다."


위의 글은 <동경잡기>에 실려 있는 상사바위에 대한 기록이다.

상사바위는 높이가 약 13미터,  길이가 약 25미터 가량 되는 큰 바위로

이 바위를 서편에서 보면 냉골 여울에 뿌리 내리고

수십미터 높이로 솟아오른 청탑처럼 보이고

동쪽에서 보면 산등성이 위에 직사각형으로 육중하게 솟아 있어

염라대왕의 궁전을 연상시키는 험상궂은 상이다.


바위 중간 쯤에가로 파인 틈에 돌을 던져 그곳에 얹히면 소원이 이루어지고

던진 돌이 떨어지면 바위신이 뜻을 받아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으며

상사바위의 남쪽편에 아이를 낳는 듯한 갈라진 바위인 '산아당'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안내판 전문>


 

 


 


 

 경주 남산 포석계 기암곡 제2사지 동삼층석탑


이 석탑은 삼릉계(三陵溪) 정상에서 서북쪽으로 약 1.3km를 이어져 내려와

포석계(鮑石溪) 본류와 합쳐지는 한 지류인 계곡 안에 절터가 있고 그 남쪽에 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바둑바위는 금오산에 있다. 바둑판 모양으로 깎은 돌이다.

이곳은 옛날 신라 때 신선들이 모여서 바둑을 두면서 놀던 곳이다.”라는 기술이 있다.

이 골짜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장구터’라고 하였으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하여 ‘기암곡’이라 불리면서 지금까지 그렇게 불린다.


이 석탑은 원래 도괴되어 있던 것을 2003년 말부터 2004년 초반에 이르는 사이에 원래의 부재를

최대한 활용하고 없어진 부재는 충실한 고증을 거쳐 복원한 것이다.

새롭게 복원한 부분은 하층기단 면석, 2층 탑신석, 3층 탑신석과 옥개석, 노반이다.

통일신라시대 9세기 후반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며 하층기단 주위에 장대석을 깔아서 탑구(塔區)를 두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이 석탑은 신재로 복원된 부분이 많은 약점이 있으나 보존할 가치가 충분히 인정된다

(출처: 문화재청)





 

 


 

 동삼층석탑 바로 옆에 또 하나의 탑지 흔적이 남아있다.

처음에는 동탑과 서탑 두 기의 석탑을 마련한

쌍탑식 가람배치를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이다.








 

지마왕릉

(사적 제221호)


신라 지마왕(112∼134)은 23년간 재위하면서 가야, 왜구, 말갈의 침입을 막은것으로 알려져 있다.
성은 박씨로서 파사왕의 아들로 무덤의 위치와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 앞에는 최근에 설치한 작은 석상이 놓여있다.

 


 전문 설명을 옮겨보면,

경주 남산 서쪽 기슭의 포석정(鮑石亭) 가까이에 있으며 주위에 송림(松林)이 울창하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봉분만 남아 있을뿐 다른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현재 전면(前面)에 작은 석상(石床)이 놓여 있으나 이는 최근에 설치한 것이다.

이 고분은 위치와 봉분의 규모 및 형태로 보아 신라 초기로 올라갈 수 있는 형식이 아니다.

신라 제6대 지마이사금(祇摩尼師金)(재위(在位) 112-134)은 일명 지미이사금(祇味尼師今)이라고도 하며,

성은 박씨이고 파사이사금(破娑尼師金)의 아들이다.

≪삼국사기≫에는 134년 8월에 왕이 아들이 없이 죽었다고만 전하고 있을 뿐 구체적인 장지(葬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