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4> 경주 사마소, 천관사지, 오릉, 재매정

박태문 2017. 8. 31. 14:25




경주 사마소, 천관사지, 오릉, 재매정


답사일 : 2017년  8월  29







1985년 8월 5일 경상북도의 문화재 자료 2호로 지정된 사마소









사마소 (司馬所)


사마소는 조선 중기 과거에 합격한 지방의 생원과 진사들이 유학을 가르치거나 정치를 자체 협의 기구이다.

지위가 높은 사람도 자기 수양을 위해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연산군 때에는 생원, 진사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백성에게 양식을 빌려주기도 하였다는 곳이다.








사마소는 언제 처음 세웠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영조 17년(1741)에 다시 세워 ‘풍영정’이라 불렀다.

원래 동쪽으로 300m 떨어진, 신라 때 월정교가 있던 자리에 있었는데 1984년 이곳으로 옮겼다.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마소(司馬所)’라는 현판은 영조 38년(1762) 당시 부윤벼슬을 지내던 홍양한이 쓴 것이다







그 옛날 생원, 진사들도 이렇게 모여 학문을 토론했으리라..








좀 더 멀리서 담아본다.








경주는 어디를 가도 유적지다.  

평일에도 답사를 오신 분들이 꽤 많다.








이 곳 건물은 원래 이곳으로부터 동쪽으로 300m 거리에 있는

신라시대 월정교 터의 북쪽 교대 위에 세워져 있던 것을 1984년 이곳으로 옮겨왔다.

건물 안에는 이 건물을 고쳐 온 내용이 담긴 현판들이 걸려 있어 그 내력을 알려주고 있다.










영광대



사마소 앞 문천에는 신라 때 축조된 월정교 석재가 어지럽게 하천 바닥에 뒹굴고 있었다.

운반할 수 있는 작은 돌은 인근 주민들이 가져가 섬돌이나 주춧돌로 사용하였고,

남은 것은 움직이기 어려운 베개 모양으로 생긴 침석과 큰 돌만 흩어져 있었다.

사마소 선비들은 월정교에 사용된 잘 다듬어진 이들 석재를 사마소 경내로 운반하여

적당한 높이의 대(臺)를 쌓고 싶었으나 여러 해를 두고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고심끝에  선비들은 모여 공사를 시작하기로 하고, 인부를 동원하여 침석 몇 개를 사마소로 옮겨 대를 쌓았는데 꼬박 7일이 걸렸다.

그리고 이 대를 영광대(影光臺)라고 이름 지었는데 이는 송나라 주희의 시에 나오는 ‘천광운영공배회(天光雲影共徘徊)’를 줄여 쓴 말이다.

하늘의 빛과 구름 그림자가 함께 어른거린다는 뜻으로, 옛 사람의 책 속에는 훌륭한 글귀와 경계로 삼아야 하는 내용으로 
독서를 통해서 사람의 심성을 함양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종상은 영광대기(影光臺記)에서 ‘이 돌은 신라 때 월정교가 되었다가 지금 영광대로 우뚝 섰다.

다시 천년 뒤에 뉘 집의 진석(鎭石)으로 사용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월정교로 있었을 때 군왕을 위한 가악의 소리를 들었고,

영광대가 되어선 문인들이 정사(政事)를 위한 여가에 음영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기술하였다.

월정교가 무너진 뒤 천년 만에 영광대가 건립되었고, 다시 천년 후에 어떠한 모습으로 변할지 모른다고 이종상은 말했다.

그러나 영광대는 세워진 후 150년도 못되어 사마소마저 옮겨간 빈터에 홑몸으로 옛 선인들의 꿋꿋한 자세를 잃지 않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제 다른 석재들과 아울러 월정교 복원이란 이름으로 다시 부재로 활용되어

천년 세월이 지난 후에나 볼 수 있을지 모를 위기에 처해 있어서 안타까울 뿐이다.

적어도 이것만은 현 사마소의 경내로 이건함이 옳다고 관련학자들은 입을 모은다.









천관사지를 알리는 안내판과 천관사지터


사적 제340호로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시대의 절터이다.

 현재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고 당시의 석탑부재와 기와편들만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곳에 있었던 천관사는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과 천관이라는 기생의 전설로 유명하다.








천관사는 천관(天官)의 집터에 세운 절로, 김유신(金庾信)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한다.


김유신은 젊었을 때 우연히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는데, 깊은 정에 빠져 매일 그녀의 집에 찾아가곤 하였다.

사실을 안 김유신의 어머니는 아들을 불러 “네가 장차 이 나라의 대들보가 되어 공명을 세워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를 영화롭게 하기를 바랐는데,

 천한 기생과 사귀어 스스로 귀함을 버리니 웬일이냐”고 물으면서 흐느껴 울었다.

김유신은 크게 뉘우친 뒤 “다시는 천관의 집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고 하였다.

어느 날 김유신은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서 집으로 돌아왔는데, 그를 태운 말이 어느새 천관의 집 앞에 이르러 멈추었다.

천관은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김유신을 보자 기쁘기도 하고 원망스럽기도 하였지만 감회를 억누르고 문앞으로 뛰어나왔다.

그러나 정신을 차린 김유신은 어머니와의 약속을 어기고 대장부의 결심을 헛되이 한 죄가 모두 말 때문이라면서,

말의 목을 벤 뒤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 일로 인해 천관은 김유신을 사모하며 원망하는 노래인「원사(怨詞)」를 짓고서 죽고 말았다.

뒷날 김유신은 사랑하였던 옛 여인 천관을 위하여 그녀의 집터에 절을 세워 천관사라 불렀다고 한다.



현재 절터는 모두 경작지로 변하여, 당시 절의 전체적인 규모와 건물의 배치 등은 알 수 없다.

다만 곳곳에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석탑의 일부분과 기와 조각들이 논두렁의 잡석 틈에 끼여 남아 있다.

이 가운데에는 돋을새김된 2단의 굄대가 8각을 이루고 있는 2장의 판석이 주목된다.










절터는 특별한 구분없이 빈 터로 남아있다.











경주 오릉(慶州 五陵)은 경주 남쪽 약 2km 지점, 문천 남안의 송림 속에 있는 능묘이다.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72호 신라오릉으로 지정되었으나, 2011년 현재의 명칭으로 변경되었다.









오릉(五陵)


경주시내 평지 서남쪽에 위치한 4기의 봉토무덤과 1기의 원형무덤이다.

삼국사기》에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와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 등 신라 초기 4명의 박씨 임금과

혁거세의 왕후인 알영왕비 등 5명의 무덤이라 되어 있다.

반면에 《삼국유사》에는 혁거세왕이 임금자리에 있은지 62년 만에 하늘로 올라갔다가 7일 후에 몸이 흩어져 땅에 떨어지자 왕비도 따라 죽으니,

사람들이 같이 묻으려고 했으나 큰 뱀이 방해해서 몸의 다섯부분을 각각 묻었는데,

그것을 오릉(五陵) 또는 사릉(蛇陵)이라 했다고 한다.

내부구조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겉모습은 경주시내에 있는 다른 삼국시대 신라무덤과 같이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으로, 1

호 무덤이 높이 10m로 가장 크며, 2호 무덤은 표주박형으로 봉분이 두 개인 2인용 무덤이다.

이러한 대형 원형 봉토무덤은 신라에서는 4세기 이후 등장하는 것으로 박혁거세 당시의 무덤 형식은 아니다.







오릉 주위에는 울창한 송림이 조성되어 있다.








알영정(閼英井) 가는 길..









신라시조왕비 탄강지( 新羅始祖王妃 誕降址)


숭덕전 옆 관리사옥 뒤편으로는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부인이 태어난 알영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신라인들은 예로부터 우물을 신성한 공간이라 생각했다.

알영정은 알영왕비가 태어난 우물이고, 박혁거세 역시 나정이라는 우물에서 태어났다.

알영정과 나정은 지척으로 붙어있으며 이 우물 주변은 신성한 공간으로 여겨져 보호되어왔다.

박혁거세의 부인인 알영은 용이 낳은 아이로 알영정 우물가에서 태어났다.

근처에 살던 노파가 가보니 용은 사라지고 여자아이만 남아있는데 아름다운 용모에 닭의 부리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아이를 데려와 개울가에서 입을 씻어주니 닭 부리는 없어지고 아름다운 용모가 드러났다.

알영은 아름답고 자태가 고왔으며 총기가 있는 아이로 자라났다.

소문을 들은 박혁거세가 알영을 데려와 비로 삼았는데 왕비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아름답고 단정한 자태를 잃지 않았으며

박혁거세를 정성을 다해 내조했다고 삼국사기에 전해지고 있다.








오릉의 능 동쪽에는 박혁거세의 제향을 받드는 숭덕전


처음에는 박혁거세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세종 11년에 지어졌으나

임진왜란때 불타 버려 선조 33년에 수리하여 세워진 건물이다.

지금은 박씨문중에서 매년 춘분과 추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한다.











사적 제246호로 지정된 재매정


안내문과 무궁화가 어우러져 앵글에 담아본다..










재매정은 신라의 김유신 장군 집에 있던 우물로 화강암을 벽돌처럼 쌓아 올려 만들었는데,

이 일대가 장군의 집이 있었던 자리로 추정된다.

궁궐터 월성지구에서 400m 되는 가까운 곳에 있다 남천을 바로 앞에 두고 있으며

'재매'는 김유신 장군의 부인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재매정 뜰 안에는 건물의 추춧돌로 썼음직한 석도물이 놓여있다.

나무기둥을 지지하기 좋아보이는 홈이 파인 석조물부터 무늬가 마모된 것 들도 있다.










최부잣집의 건물도 신라시대의 주춧돌을 그대로 사용하여 집을 지었다고 한다.








재매정 (財買井)

재매정은 1.5m가량의 사각형 우물로, 우물가에는 1872년에 세워진 비각이 있다.

644년(선덕여왕 13)에 소판이 된 김유신은 연달아 여러 차례 백제와의 싸움에 출정했는데,

싸움터에서 돌아오자마자 가족을 만날 틈도 없이 곧장 다른 싸움터로 보내지는 일이 거듭되었다.


645년 3월에도 김유신은 싸움터에서 귀환하자마자 다시 서쪽 국경으로 출정하게 되었다.

그래서 집안에는 들어가지도 못한 채 집 문앞을 그냥 지나가게 되었는데, 50걸음쯤 가다가 멈춰서 자기 집 우물에서 물을 떠오라고 시켜 마셨다.

그러고는 "우리집 물맛은 옛날 그대로구나"라고 말한 뒤 계속하여 길을 갔다.

이렇게 가족과의 이별을 한탄하지 않고 의연하게 싸움터로 나가는 김유신의 태도는

이를 지켜보던 군사들에게 귀감이 되어 그들을 싸움터로 이끌었다고 한다.








조선 고종 9년에 세운 유허비와 재매정









화강암 부재들이 경내에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이 사진으로 안내되어 있다.








이번  답사는 경주 시내의 다른 유적지와 비교적 떨어져 있어

고즈넉한 분위기에서 답사와 산책을 즐길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인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