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27> 낭산1(장사벌지지,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박태문 2018. 4. 19. 09:51





낭산1(장사 벌지지, 망덕사지, 사천왕사지, 선덕여왕릉)


답사일 : 2018년 4월 10일






경주 낭산일원(慶州 狼山 一圓)은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유적분포지이다.

1968년 12월 13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누에고치모양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워 낮은 구릉을 이루는 이 산은

신라 실성왕 12년(413)부터 신성하게 여겨져 성역으로 보존되어 온 곳이다.


기록에는 ‘왕이 낭산에 상서로운 구름이 서린 것을 보고 신하들에게 신령이 하늘에서 내려와 노는 곳이니 당연 복을 주는 지역이다.

이제부터는 낭산의 나무 한 그루도 베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7세기부터는 불교의 성스러운 산으로 왕실에 복을 주는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선덕여왕의 유언에 따라 만든 여왕의 능을 비롯하여 신라 향가의 현장인 사천왕사지,

문무왕의 화장터로 여겨지는 능지탑, 바위에 부처를 새긴 마애불, 구황리 삼층석탑 등 신라 유적이 많이 있다.

(출처: 문화재청)








 

장사 벌지지


'장사(長砂)'는 남천의 '긴 모래밭'이 '벌지지'는 '뻗치다'의 한자음이다.

신라 눌지왕때 박제상이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로 보내진 두왕자 중 고구려에 보내진 보해를 구하고 나서,

 왜국에 보내진 미해를 구하기 위해  집에도 들리지 않고 왜국에 보내졌다.

이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아내는 그를 쫓아갔으나 만나지 못하여서 

망덕사 남쪽문 앞 모래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워 통곡 하였다 하여 이 모래벌을 장사라 하고, 

 드러누운 박제상의 아내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일으킬 수가 없었다 하여, 

'뻗치다'의 한자음인 '벌지지'로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전해진다.








장사 벌지지비 뒷모습


신라충신 박제상의 부인인 국대부인이 남편을 왜국으로 떠나 보내고 슬픔에 못이겨

목놓아 울던 사연이 소개되어 있다.









장사 벌지지 뒤 쪽으로 언덕위 솔슾이 자리한다.

그곳에 망덕사지의 잔해들을 볼 수 있다.










망덕사지의 흔적










망덕사탑에서는 신라의 목탑 유구 가운데 유일하게 팔각 형태의 심초석(心礎石)이 확인되고 있는데,

동서 심초석 모두 가운데 사리공에 사리함을 봉안한 2단으로 구성된 네모 모양의 구멍이 패여 있다.

팔각형 한 변 길이는 동탑이 60cm, 서탑이 동서남북 60cm에 북동, 북서, 남동, 남서 50cm이며,

사리공의 네모 모양으로 된 구멍은 동탑이 가로세로 25cm, 서탑은 23cm이다(서탑 사리공의 경우 사천왕사 목탑의 크기와도 비슷).

탑의 바닥에는 무늬 없는 전돌을 깔았던 것으로 확인되었고 한다.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쌍탑 절배치를 보이고 있는 모양이다.

2013년에 정비를 위하여 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강당터의 위치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고려시대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이 밝혀졌다고 한다.










사지에 위치한 안내문의 내용을 옮기면,

경주 망덕사지 (사적 제7호)

망덕사는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신문왕 5년(685년) 4월에 처음 건립되었다고 한다.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하면 당나라의 외침을 막기 위하여 신라에서 사천왕사를 지었는데,

당나라에게는 황제를 위한 절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였다.

 이 말을 듣고 당에서는 예부시랑 악붕구를 신라에 보내어 사천왕사를 살펴보게 하였다.

신라 조정은 사천왕사를 보여서는 안 되리라 여겨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 곳으로 당의 사신을 인도하였다.

그러나 사신이 사천왕사가 아니라 하여 새로운 절에는 끝내 들어가지 않아 신라의 관리들이 사신에게 금을 주었다. 








그 후 사신은 돌아가서 사천왕사는 황제를 만수(萬壽)를 빌고 있는 절이라고 거짓보고 하였다.

 이후 새로지은 절을 망덕사라 하였다.

현재 망덕사지에는 동서13층 목탑지와 금당터, 강당터, 중문터, 회랑터, 익랑터 등이 남아 있다.







사지전역에는 건물의 초석으로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남아 있다.









망덕사지 목탑지


망덕사터 부지는 대부분 경작지로 개간되어 있으며, 동서 목탑과 금당, 강당, 중문, 회랑, 익랑의 터 및 당간지주 등이 남아 있어

전형적인 통일신라 시대의 쌍탑 가람 배치를 보인다고 한다.

2013년에는 절터 정비를 위하여 실시한 시굴 조사에서 강당터의 위치를 추가로 확인하였으며,

고려 초기까지 사찰이 존속하였음도 밝혀졌다고 한다.











삼국유사》(三國遺事)는 망덕사를 짓게 된 것이 신라 국가를 불법(佛法)의 힘으로 외세로부터 수호한다는 사상에서

지어진 사천왕사(四天王寺)를 당에 들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적고 있다.

앞서 신라를 침공하려는 (唐)의 수군이 670년671년 두 차례에 걸쳐 느닷없는 풍랑으로 바다에서 침몰하고,

신라에서 와 있던 박문준(朴文俊)으로부터 신라에서 낭산 남쪽에 천왕사를 지어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며

법회를 열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당 고종(唐高宗)은 예부시랑(禮部侍郞)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보내 사실 관계를 확인하게 하였다.


신라의 문무왕(文武王)은 사천왕사를 당의 사신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 사천왕사의 남쪽에 새로운 절을 지어 그곳으로 악붕귀를 인도하였다.

그러나 악붕귀는 "이 절은 사천왕사가 아니라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다."라며 새로운 절에는 끝내 들어가지 않았다.

이에 신라의 관리들이 금 1천 냥을 뇌물로 주었고, 귀국한 악붕귀는 고종에게 "신라는 천왕사(사천왕사)를 짓고 새 절에서

황제의 만수무강을 빌고 있었을 뿐입니다."라고 보고했다.

이후 새 절의 이름은 악붕귀의 말에서 딴 망덕사(望德寺)가 되었다고 한다.

(출처: 문화재청)









솔숲에 자리한 절터의 흔적..









망덕사지 당간지주

보물 제69호, 경북 경주시 배반동964


이 당간지주는 원래의 모습으로 65㎝ 간격으로 서로 마주보고 서 있으며,

안쪽의 위쪽에 장방형의 구멍을 만들어 깃대를 세운 상태로 고정시키는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각면에 아무런 조각과 장식이 없으나 소박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고 있다.

망덕사가 신라 신문왕 5년(685)에 세웠던 사찰이므로 당간지주 역시 같은 연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시대가 뚜렷한 통일신라 초기의 작품이기 때문에 당시의 당간지주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높이는 2.5m이다. (출처: 문화재청)








절터의 흔적만이 남아있다..








역사를 담고, 세월을 담는 절터의 흔적들..










망덕사지는 그래도 잘 정비되어 있는 편이다.









망덕사지 방형초석















망덕사지와 사천왕사지는 맞은편에 위치한다.

사천왕사가 자리한 낭산 자락은 신유림(神遊林)이 있었던 곳이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부터 신라의 토착신이 노니던 곳이라며 신성시했던 숲이다.  









사천왕사지의 목이 잘린 귀부









좀 더 가까이서 담아본다.








비석을 떠받치던 귀부이리라..











길쭉하고 가지런한 앞발 발가락이 인상적이다












신라 국가의 중요한 사찰로써 조정은 사천왕사성전(四天王寺成典)이라는 부서를 따로 두어 절을 관리하였다고 한다.









사천왕사는 679년(신라 문무왕 19년)에 창건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당나라 고종이 신라를 공격하려 하자 당시 당나라에 가 있던 의상(義湘)은 당에 갇혀 있는

김인문(金仁問)·김양도(金良圖) 등으로부터 사전에 이 내막을 듣고 670년(문무왕 10년)에 귀국하여

사태의 긴급함을 문무왕에게 알리고 명랑법사(明朗法師)로 하여금 679년에 사천왕사를 짓고

 문두루(文豆婁)의 비법(秘法)을 써서 당병의 침략을 실패로 돌아가게 하였다고 한다. 

 

《삼국유사》에는 신라 말의 혼란기인 경명왕 3년에 사천왕사 오방신이 든 활의 줄이 끊어지고,

벽에 그려진 사자가 울고 그림 속에서 개가 뛰쳐나와 뜰을 노닐다 다시 그림 속으로 돌아가는 등의 괴이담이 수록되어 있다.

1922년에 조선총독부 주재로 최초 발굴이 이루어졌다.

(출처: 문화재청)








현재 절은 없어지고, 남북이 105미터, 동서가 73미터의 터만 남아 있다.

1922년의 최초 조사에서 사천왕사 관련 문헌 및 기초조사를 통해 금당과 양쪽의 탑,

북쪽의 두 건물지를 실측조사하였고, 녹유 귀면와가 발견되었다.

1929년에 당시 경성공전 교수이자 건축사가 후지시마 가이지로는 사천왕사터를 답사하고

실측, 현황 조사를 거쳐 추정배치도를 작성하였는데, 한국에서는 쌍탑가람제(雙塔伽藍制)에 따른 최초의 절이다.
(출처: 문화재청)









금당(金堂)을 중심으로 남북은 긴 낭무(廊廡)로 둘러 있고 남쪽 낭무의 중앙에는 중문지(中文址), 북쪽 낭무의 중앙에는 강당지(講堂址)가 있다.

절터에는 현재 초석(礎石)·사천주(四天柱)의 초석 등이 있으며, 여기에서 우수한 부조(浮彫)의 당초문(唐草文)이 있는

와당(瓦當)·부전(敷塼)·녹유(綠油)의 화릉형전(花陵形塼)·사천왕의 부조전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절터의 흔적만이...









사천왕사의 터만 덩그런히 남아 역사를 기억한다.









경주 선덕여왕릉(慶州 善德女王陵)

경상북도 경주시 보문동에 있는 신라의 왕실무덤이다.


1969년 8월 27일 대한민국의 사적 제182호로 지정신라 최초의 여왕이자 27대 왕인 선덕여왕(재위 632∼647)의 무덤이다.

높이 6.8m, 지름 23.6m의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무덤으로,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하여 2∼3단의 둘레돌을 쌓았다.

선덕여왕은 아들이 없던 진평왕(재위 579∼632)의 딸로서 성골이라는 특수한 신라 왕족의식에 의해 여왕이 되었다.

첨성대와 분황사, 황룡사 9층탑 등을 세웠으며, 김유신, 김춘추와 더불어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았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여왕이 죽거든 부처의 나라인 도리천에 묻어 달라고 하였으나

신하들이 이해를 못하자 여왕이 직접 도리천이 낭산(狼山) 정상이라 알려주었다.

문무왕이 삼국통일을 한 후 낭산에 사천왕사를 지었고, 낭산의 정상이 도리천이라 한 여왕의 뜻을 알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출처: 문화재청)









선덕여왕릉비









뒷 모습도 담아본다.

신라의 제27대 왕이며 한국사 최초의 여왕.. 선덕여왕의 숨결이 쉬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