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9> 분황사, 황룡사지, 황룡사지 절터

박태문 2017. 9. 22. 12:01





분황사, 황룡사지, 황룡사지 서편절터, 황룡사 전시관


답사일 : 2017년  9월  19일








분황사 석탑


안산암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높이 9.3m의 모전석탑이다.

분황사 창건 당시 만들어진 석탑이 임진왜란 때 반쯤 파괴되었는데, 조선시대에 이 절의 중이 수리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더욱 파손시켜 1915년 다시 수리를 하였다. 현재는 3층으로 되어 있으나 원래는 7층 혹은 9층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기단은 한 변 약13m, 높이 약l.06m로 크기가 제각기 다른 막돌로 쌓았다.

밑에는 상당히 큰돌을 쌓았고 탑신 쪽으로 갈수록 경사가 급해지고 있다.

기단 위에는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다.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탑신은 위쪽이 아래쪽보다 약간 좁다.

1층 네 면에는 입구가 열려 있는 감실을 만들어 놓았으며 입구 양쪽에 인왕상을 세웠다.

이 인왕상은 모두 반라이며 옷 무늬가 각기 다르다.

 전체적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답게 막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 7세기 삼국시대의 조각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탑의 1층 네 면에 감실을 만든 것은 목탑의 뜻을 살린 것이다.


현재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이 놓여 있는데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2층과 3층은 1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되어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해체, 수리할 때 2층과 3층 사이에서 석함 속에 장치된 사리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때 발견된 병 모양의 그릇, 은합, 실패와 바늘, 침통, 금은제 가위 등은 경주박물관에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기단부에 놓인 돌사자상


모전석탑 기단부의 2마리 돌사자상과 2마리 돌물개상이 있다.

화강암으로 조각한 동물 한 마리씩을 네 모퉁이에 배치하였는데, 동해를 바라보는 곳에는 물개,

내륙으로 향한 곳에는 사자가 있다.








약간의 다른 모양의 사자상









전체적으로 훼손된 돌물개상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석등 받침대









분황사 석정


분황사 사찰내에 마련되어 있는 돌우물이다.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다.


‘호국룡변어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다.

원성왕 11년(795)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다.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주었다.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분황사 관음전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되었으며, 신라 서라벌내 7개 가람 중 하나에 속한다.

조선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경내에는 모전석탑을 비롯하여 화정국사비의 귀부와 석정, 석조, 석등 등의 유물이 있다.

국보 제30호로 지정된 모전석탑은 안산암의 석재를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으로 분황사 창건과 같은 시대에 세운 것으로 보고 있다.

원래의 규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반적으로는 9층탑으로 보고 있는데 현재에는 3층만이 남아 있다.

1915년 일본인들이 수리하던 당시 2층 탑신과 3층 탑신의 중간에서 석재의 사리함이 발견되어

그 속에서 각종의 비취옥을 비롯한 옥재류와 가위. 은바늘 등과 함께 숭녕통보 등의 고전이 발견되었는데,

고려 시대에 이 모전석탑을 해체하고 수리하면서 동전 등을 봉납하였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넓은 기단의 네 구석에는 석사자를 배치하였다. 1층 탑신의 4면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출입구가 있으며,

양편에는 불법을 수호하는 인왕상을 조각하였는데 부드러우면서도 힘찬 모습은 신라 석조미술의 걸작품에 속한다.

화정국사비의 귀부는 「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고려평장사 한문준의 소찬'으로 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후까지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현재 비신은 유실되고 귀부만 남아 있다. 석정은 당나라 사신과 두 마리 용간에 얽힌 전설이 있는 우물로서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분황사 관음전 내부







분황사 관음전 내에는 분황사약사여래입상 (芬皇寺藥師如來立像)(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이 있다.
분황사 보광전에 모셔져 있는 이 불상은 모든 중생의 질병을 구제해 준다는 의미의 약사여래불이다.

원래 분황사에는 무게 30만 6700근의 동(銅)으로 만든 신라 최대의 불상인 약사여래좌상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1998년에 불상이 있는 보광전을 고쳐 짓기 위해 해체하던 중 발견된 기록을 통해 분황사는 임진왜란 때 불에 탔으며

현재의 불상은 1609년에 동 5360근으로 만들었고 보광전은 1680년 5월에 다시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불상의 왼손 위에 놓인 약그릇 뚜껑 안쪽에 ‘건륭(乾隆) 39년 을미(乙未) 4월 25일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건륭 39년은 을미년이 아니라 갑오년이기 때문에 이 기록을 사실대로 믿기는 어렵다.
불상의 얼굴은 둥글고 육감적이어서 세속적인 느낌을 주며, 때로는 어린이의 얼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두껍게 입고 있으며, 옷주름의 표현은 다분히 형식적이다. 손에는 약그릇을 들고 있어서 약사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전체적인 조형기법과 보광전 보수시 발견된 기록을 종합해 볼 때 조선 후기의 불상으로 추정된다.


불상을 사진에 담지 못하여 아쉬움이 남는다.






분황사 화쟁국사비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


통분황사 내의 우물 옆에 놓여 있는 것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다.
낮은 직육면체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네 모서리가 떨어져 나가 많이 훼손되었다.

윗면에는 비를 꽂아두기 위한 홈이 파 놓았고, 옆면에는 옅은 안상(眼象)을 새겼다.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는데, 원효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김정희가 절 근처에서 발견하여 이를 확인하는 글귀를 받침돌에 새겨두었다.

비는 임진왜란 후까지도 보존되었으나, 지금은 이 받침돌만이 남아있다.









대원심 보살 사리탑


불기 2477에 치아에서 사리가 나오는 등 불도에 정진한 대원심보살의 사리를 봉안한 사리탑








대원심 보살


전해지는 유래는, 안성에 사는 대원심 보살은 아들이 위암말기로 진단되어 죽음을
선고받자 괴로움을 가눌 길이 없어 청룡사의 관세음보살을 찾아갔다.

이미 80세가 넘은 노보살인지라 절을 올리기 힘든 처지였다.
대원심 보살은 다만 가만히 벽에 기대어 앉아 관세음보살을 우러러보며 念하였다.

"관세음보살님,부모가 죽은 다음 자식이 죽는 것이 이 세상의 순리이온데,

저의 업이 얼마나 중하길래 이렇게 자식이 먼저 죽는 것을 보아야 하나이까?

자비로우신 관세음보살님! 제발 아들을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살려주옵소서...."

3일 밤낮을 아들의 병이 기적처럼 쾌유되기를 기원하며 관세음 보살을 찾다가 새벽녘에 잠깐 잠이 들었는데,

그 때 스님 한 분이 활짝 핀 연꽃 한송이를 대원심보살에게 주었다.
꿈을 꾼 것이었다.

보살은 상서를 보고 집으로 돌아와 아들과 함께 치유불능이라는
진단을 했던 서울대학교 병원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재검사결과 위암의 흔적은 자취조차 찾아볼 수 없었고,
담당의사는 있을 수 없는 불가사의라며 매우 신기해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간절한 기원이 아들의 병을 완치시킨 것이었다.










분황사 석재들 - 석조, 초석, 석대, 대석









약사여래동상개금불사공덕비


분황사 동쪽 담장 아래도 발굴된 여러 석재가 놓여 있고

그 옆에는 1963년(불기 2990년)에 세운 약사여래동상개금불사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192호인 '경주구황동당간지주(慶州九黃洞幢竿支柱)'


절에서 당이라는 깃발을 달았던 깃대를 당간이라고 하는데,이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해 양옆에 세운 돌기둥을 당간지주라고 한다.


이 당간지주는 분황사 바로 앞에 있는데, 통일 신라시대의 것으로 높이는 360cm이다.
양 기둥 사이에는 동쪽으로 향한 돌거북이가 있는데 당간의 받침돌로 돌 거북이를 배치한 것은

다른 당간지주에서는 흔히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양식이다.

기둥의 일반적인 형태이며 3개의 구멍을 설치하여 양 기중이 서로 관통하도록 조성되어 있다.

이 당간지주는 황룡사 것이 아니라 분황사 소유였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보고있다.








멀리 황룡사 역사문화관이 보이고..









황룡사 우물터









절터가 넓게 펼쳐지고..








사찰의 중심 건물이었으며 "본존불"을 모시는 곳이 금당인데
이곳은 삼국유사에서는 황룡사 금당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도 전해지고 있다.







 작은 돌마저 다 쓰임새가 있었던 것들이다










 분황사의 몇 배나 되는 커다란 황룡사 절터


 이름의 유래는 누런 용이 하늘로 올라갔다고 해서 ‘황룡사’라는 이름을 붙여졌다고 한다.

진흥왕 14년, 즉 553년에 짓기 시작해서 완전히 마무리할 때까지 거의 200년이나 걸려 완성한 아주 커다란 절로 전해진다.







절터의 주춧돌이 보이고..









장륙상을 모셨던 자리..


황룡사 장륙상은 황룡사 구층탑, 진평왕의 천사옥대와 함께 신라3보로 전해지는 보물이다.









목탑지


황룡사를 대표하는 건축물을 꼽으라면 대부분 황룡사 9층목탑을 꼽을 것이다.

이곳이 당시 최대의 규모를 자랑한 황룡사 9층목탑이 있었던 곳이다

사진은 9층 목탑의 초석(기둥을 세운 주춧돌)이다.

선덕여왕때 만들어져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자장법사의 요청에 의해 만든 탑이라고 한다.


황룡사 9층목탑에서 아홉개의 층은 당시 신라 주변의 9개 나라를 의미했다고 한다.

선덕여황은 9층목탑을 통해 여러나라의 끊임없는 침입속에서도 흔들림없는 강한 신라가 되기를 염원했을 터였다.

해서 황룡사가 호국사찰의 성격을 띄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분석하고 있다.







553년 진흥왕은 월성 동쪽에 새로이 궁궐을 짓도록 했는데 그 자리에서 황룡이 나타나자 궁이 아닌 절을 만들기로 결정했다.

불국사의 8배에 이를 만큼 당대 최대 규모로 만들어진 황룡사는 17년의 공사 끝에 완성되었다.

용이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에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황룡이 나타났다는 전설을 적고 있으며,

황룡사의 이름에 임금 황()자를 썼다는 점은 왕실의 원찰로 건설 과정에서부터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명확하게 깔린 것이라 해석할 수 있다.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가 들어온 것은 5C초 눌지마립간이 왕에 있던 시기이다.

토착 종교를 믿던 귀족들의 반대로 불교는 공인되지 못하다가

100년이 지나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527)하면서 비로소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법흥왕의 뒤를 이어 왕에 오른 진흥왕은 불교가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상황에서 토착 종교의 힘을 누르기 위해 이라는

전설의 동물을 이용하여 사찰을 짓고 왕실의 권위를 나타낸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이렇게 만들어진 황룡사는 고려시대까지 호국 불교의 역할을 수행한다







안내표지판이 없으면 드넓은 곳에, 어디가 어디였는지 짐작조차 어렵다..









안내판으로 중문터임을 알 수 있다.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던 황룡사,

그리고 아파트 25층 높이인 82m라는 어마어마한 높이의 위용을 뽐냈던 황룡사 9층목탑. 

원나라 침략 때 절과 목탑은 불에 타 소실되어 그 때의 영광은 아스라이 사라졌다. 








목탑의 모습..







황룡사 역사문화관









3D상영관 황룡사 전경








3D 황룡사 9층목탑의모습









3D 화재로 소실되는 목탑









황룡사 찰주본기 - 9층목탑의 창건 이야기부터 창건 과정과 중수과정까지 모두 기록되어 있다.

(진품은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다양한 황금 유물들









황룡사의 건축공법이 설명되어 있고..









신라에는 세 가지 보물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하늘이 진평왕에게 내려주었다는 천사옥대와 황룡사에 있던 9층탑과 장륙존상이 그 주인공이다.

신라를 수호하는 삼보 중 천사옥대는 고려가 삼국을 통일할 때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 왕건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는데 그 후의 행방을 알 수가 없다.

황룡사의 9층탑과 장륙존상은 몽고의 침입으로 황룡사가 불타 없어지면서 잿더미로 변하였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하고 기억할 신라의 삼보 중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황룡사지 터에 자리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가면 황룡사에 있던 두 보물의 모형을 만날 수 있다

인도의 아육왕이 불상을 만들다 실패하자 다른 땅에 가서 자신의 염원이 이뤄질 것을 기원하며 금과 구리, 모형 석가삼존상을 배에 띄워 보냈다.

그것이 신라에 이르러 574년 진흥왕 때 장육존상이 만들어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황금을 쏟아부어 2kg가 넘는 부처상을 만들었으니 황룡사9층탑에 견줄만한 작품이었을 것이다.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청동나발의 일부를 과학적으로 분석해 장륙존상의 부처상의 얼굴 크기를 재현하였다.

당시의 기술로 어떻게 이렇게 거대한 부처상을 만들 수 있었을지 의아하다. 옛 장인들의 위대한 기술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문학관에서 내려다보이는 황룡사지 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