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묘
순례일 : 2018. 9. 13
가을을 재촉하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두 손을 모은 심령은 간절함으로 기도를 드린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편히 쉬는 그 품이 되었으면 좋겠다.
성전 입구 왼편에 있는 성요셉상
문산성당
마산 본당(1900년 설립)에 이어 마산교구에서
두 번째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문산성당은 서부경남지역 신앙의 요람이다.
1866년 병인박해 전부터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고, 1899년 엄타케신부가 처음 진주본당을 설립할 때
진주지역 24개 공소 중 가장 신자가 많았던 곳이 문산본당의 전신인 소촌공소이다.
전국을 피로 물들인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이 지역 교우 정찬문(안토니오)이 1865년 9월 20일 진주포교에 잡힌다.
배교강요와 거듭되는 혹독한 문초에 태를 너무 많이 맞아 석 달 뒤 12월20일(음력)감옥에서
숨을 거두어 진주 지방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친척들이 시신을 요청하자 관에서는 머리를 남겨두고 몸만 내어 주었다.
양반가문이었고 재심을 청구한 문제의 죄수였기 때문이다.
3일만에 머리 없는 시시을 인도받아 사봉면 무촌리에 운구하여 무덤을 섰는데
장사때까지 몸이 굳지 않고 화색이 있는 산 사람 같았다 한다.
순교의 역사를 지닌 이 곳 소촌공소는 1905년 11월 본당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른다.
옛 성당 우측으로 약간 높은 곳에 지금의 성당이 있다.
성당 정면에는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이 입구 쪽으로 향해 있어 오는 이들을 환대하고 있다.
1937년에 성당과 사제관을 신축하여 축성식을 가졌다.
높이 솟은 십자가 아래 종탑을 세운 성당은 19세기 고딕 부활(Gothic Revival) 양식에서 볼 수 있는
현대적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벽체 전체를 철근 콘크리트로 시공하였다.
서양식 건축양식을 당시 한국인 본당 신부와 교우가 현지 여건에 맞춰 재해석해 설계하고 건축한 점이 돋보인다.
종탑에 설치된 프랑스계 종 두 개는 일제와 한국전쟁 때 빼앗기지 않기 위해
두 번 성모동굴 뒤 언덕 땅 속에 묻히는 시련을 극복한 역사를 가졌다.
또 한국전쟁 때 성당이 인민군 내무서로 징발되어 철수하며 마구 쏘아댄 총탄으로
제대, 성상, 십자가길 등이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일제시대 군수 물자로 강제 징방될 위기에 처했을 때 종을 떼어 땅에 묻어 숨겨 버린 후
나중에 다시 파내어 종을 설치하여 지금까지 유지되어 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그 당시의 시대를 반영하며 아픈 역사를 터치한다.
성모동굴
성당 오른쪽 나지막한 동산 바위에 루르드 마사비엘 성모동굴이 조성되어 있다.
설립연도인 ‘1932’가 새겨진 동판이 부착 돼 있는데 흐릿한 글씨가 세월의 흐름을 말해 준다.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 순교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는 진주시 사봉면 출신으로 아내의 권면으로 입교 영세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 때에 잡혀 진주 감옥에 갇혀 심한 문초와 고문을 당하고 배교의 유혹을
부인 윤 씨의 격려로 물리치고 1867년 1월 25일 진주 옥에서 45세로 참수 치명했다.
그의 일가들이 머리를 수습하지 못한 하체만을 가져다 장사지내고,
순교자의 머리가 없다고 하여 무두묘(無頭墓)라 불리게 되었다.
1948년 문산 성당 서정도 벨라도 신부와 신자들, 정 씨 문중의 노력으로
순교 복자 정찬문 안토니오의 무덤을 찾아 정비하고 순교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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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증거하기 위해
모든 고통을 참고 이겨내어 몸으로 증거하신
신앙의 선조들이 있기에
후대가 이렇게 편안하게 믿음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이겠지..
문득 가슴이 먹먹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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