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수원화성, 행궁 건축의 백미 화성행궁을 찾다..
방문일 : 2015년 10월 18일
군사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디자인의 건축물이 하나도 없는 것이 특징인 수원 화성..
화성은 18세기에 만들어진 군사건축물의 모범으로 18세기에 만들어진 전 세계 성곽 중에서 가장 잘 만들어졌다.
정조는 화성 축성 시 “미려(美麗)함은 적에게 두려움을 준다.” 라는 표현까지 했다고 한다.
200여 년 전 건축물을 아름답고 화려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힘이 있기에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조의 생각이었다.
▲한 눈에 보는 화성 Ⓒ두산백과
정조의 수원 화성의 건립
정조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긴 것은 큰 뜻을 펴기 위해서였다.
정조는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려면 새로운 정치 공간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충성스러운 신하, 군사력, 그리고 이들을 원만하게 다룰 수 있는 자금 세 가지 요건이 필요했다.
정조는 수도인 서울에서는 이 세 가지 모두를 얻기 어려우며, 신도시를 건설하는 방법이 최선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그런 목적의 정치 공간을 아버지의 추모 사업과 연결하여 일석이조의 효과를 얻는다면 금상첨화가 아닐 수 없었다.
수원부는 서울과 남쪽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 활동을 위한 도시이고, 사도세자의 현륭원이 인근에 있었기 때문에 안성맞춤이었다.
정조는 자신의 야망을 구현시킬 대역사를 당시 30세인 실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에게 맡겼다.
처음 1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했던 공사는 놀라운 속도로 진행됐다.
1796년 10월, 단 34개월(중간의 6개월 정역(停役)을 생각하면 28개월)만에 낙성연을 치렀는데 수원 화성과 같이 방대한 공사를
2년 반이라는 단기간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실학자인 정약용과 같은 젊은 피를 수혈하여 종전과 차원이 다른 계획에 따라 건설했기 때문이다.
정조는 왕권 강화를 위한 새로운 정치 공간으로서 수원부에 신도시를 건설했고, 실학자 정약용에게화성의 축조를 맡긴다.
다산 정약용은 상업적 기능과 군사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는 평산성 형태를 기본으로 수원 화성을 계획하였다.
신풍루
화성행궁의 정문으로
신풍이란 '국왕의 새로운 고향'이란 뜻으로 정조대왕의 수원사랑을 보여준다..
신풍루 앞에서는 국내외 관광객을 위한 무예 24기 시범과 장용영 수위식 등 상설 공연이 펼쳐진다.
화성행궁 안내도
2007년 4월 1일 사적 제478호로 지정된 화성행궁은 팔달산(八達山) 동쪽 기슭에 576칸 규모로 건립됐다
효성이 지극했던 정조가 부왕 장조의 능침인 화산릉을 참배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행궁에서 쉬어 갔다..
신풍루의 곡선.. 한국의 미는 어떤것과도 견줄 수 없다..
좌익문
좌익문은 중앙문 앞에 있으며, '좌익은 곧 곁에서 돕는다'는 뜻으로 내삼문을 바로 앞에서 도와 행궁을 지키는 중심문이다.
수령이 600년 이상 된 느티나무인 노거수..
수원화성 성역 이전부터 수원을 지켜온 신령스런 나무로 예로부터 신목, 영목으로 불려왔으며,
잎이나 가지를 꺾으면 목신이 노여움을 사 어려움이 닥치는 반면, 소원지에 소원을 적어서 걸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았다..
중앙문
중앙문은 궁궐 건축의 삼문 설치 형식에 따라 행궁의 정전인 봉수당을 바로 앞에서 가로막아 굳게 지키는 역할을 하는 내삼문이다.
봉수당
화성행궁의 정당으로, 정조대왕은 이 곳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열었다.
정조 19년인 1795년 윤2월 13일 수원 화성행궁에서는 성대한 잔치가 열렸다.
정조의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탄신 60주년 잔치다.
혜경궁은 화성행궁의 정전인 봉수당(奉壽堂) 안에 머무르고, 그 바로 앞 왼편에 정조가 자리를 잡았다.
융복(戎服ㆍ왕을 호위할 때 입는 군복)을 차려 입은 친인척과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마당에는 여령(女?ㆍ궁중무용을 하던 여성)들이 다양한 궁중정재(呈才ㆍ무용)를 선보였다.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세밀하게 그린 ‘봉수당진찬도(奉壽堂進饌圖)’는 지난달(2015. 9. 3) 문화재청 보물로 지정되었다.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봉수당진찬도' (문화재청 제공) (출처:한국일보 2015. 6. 23자료)
그림에서 봉수당으로 통하는 중앙문 밖에 길게 늘어선 백관들의 모습이 행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건축물의 웅장함, 기품과 아름다움에 눈길을 땔 수가 없다..
봉수당 내부..
회갑연을 재연시켜 놓았다.
일제강점기 때 주건물인 봉수당에 의료기관인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
모든 것이 모든것이 훼손되고 낙남원만 남게 되었다.
원래 이름은 정남헌이었는데 정조의 모친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이곳에서 베푼 후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봉수당으로 불렀다.
유여택
정조대왕이 행차중 잠시 머물며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이다.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행궁인지라,, 담도 끝이 없다..
미로한정
행궁 후원에 만든 정자로 '장래 늙어서 한가하게 쉴 정자'라는 뜻이다.
노래당과 함께 갑자년(1804)에 세자에게 양위하고 화성으로 가리라던 정조대왕의 뜻이 담이 이름이라고..
가을과 참 잘 어울린다..
낙남헌
1795년 혜경궁 홍씨 회갑연 기간중 과거시험과 양로연 등의 여러 행사가 열렸던 곳이다..
실학자 유형원과 정약용이 성을 설계하고 거중기 등의 신기재를 이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성안의 부속시설은 행궁 중포사 내포사 사직단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행궁의 낙남헌만 남아있는 실정디다.
정조 ‘개혁의 꿈’이 어린 화성은 다른 성곽과 달리 창룡문(동) 화서문(서) 팔달문(남) 장안문(북) 등
4대문을 비롯한 건축물들이 돌과 벽돌로 지어졌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화령전 경내로 들어서면 제정이 보인다.
제사를 지낼때 물을 뜨던 우물이다..
낙남헌 북쪽의 화령전
화령전은 사적 제115호로 1801년(순조 원년)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이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달리 영전은 보통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생전에 계실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다.
운한각(雲漢閣)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운한각 북쪽의 풍화당..
재실로서 제향이 있을 때 제를 올리는 사람이 미리 머무는 건물이라고 한다..
풍화는 사회의 풍속과 기강을 교화시킨다는 의미라고..
수원 화성의 상설공연인 무예24기 공연..
화성의 무예는 조선 최고의 군대라고 평가받는 장용영(壯勇營)의 무예이다.
장용영은 정조의 친위 군영으로 알려져 있고, 정조의 명에 의해 장용영에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를 편찬하여
‘무예24기’가 탄생했다고 알려져 있다.
시범공연..
크로 간결한 무예시범이다..
호쾌한 멋을 지닌..
검을 잡은 시범단의 표정이 비장하기까지 하다..
고풍스런 신풍루의 분위기에서 이색적인 조화가 느껴진다..
절도있게..
신풍루 앞에서 펼쳐지는 상설공연,,
성곽길이 너무 예뻐서 몇시간 뚝딱 걸을 수 있을것 같은 느낌...
낮보다도 야경이 매력적일것 같다..
치(雉)는 성곽의 요소요소에 성벽을 돌출시켜서 전방과
좌우방향에서 성벽에 접근하는 적병을 방어하기위한 시설로
수원화성에는 10개소가 있다.
서1치(西1雉), 서2치(西2雉), 서3치(西3雉), 남치(南雉), 동1치(東1雉),
동2치(東2雉), 동3치(東雉), 북동치(北東雉), 용도동치(甬道東雉),
용도서치(甬道西雉), - 서남1치(西南1雉), 서남2치(西南2雉)
치성위에는 누각이 없으며, 치는 '꿩'이란 뜻으로 본래 꿩은
제몸을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치(雉)는 꿩을 의미하는데 꿩이 자기 몸을 잘 숨기고
밖을 엿보기를 잘하기 때문에 그 모양을 본따서 치성이라고 한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치성의 모습이 눈에 띈다..
수원화성은,
총길이 5.7km, 면적 1.2 제곱킬로미터에 이르고 장안문,팔달문,창룡문,화서문의 4대문을
비롯하여 5개의 암문과 2개의 수문을 합하여 11개의 성문, 5개의 포루, 4개의 각루,
2개의 공심돈, 1개의 봉돈, 10개의 치, 2개의 적대 등등 총 48개의 시설물로 이루어져 있는
조선 정조때 축성한 성으로, 당시 임금인 정조가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새로운
정치공간을 필요로 했고 그 장소로 수원부를 택해 실학자 정약용과 함께 대역사를 시작,
단 34개월만(1796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자체 방어시설까지 갖춘 봉수대인 봉돈
수원화성의 봉돈은 화성의 상태를 한양에 알리는 봉수대로써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길로 인근 지역에 위험을 알리는 긴급 통신수단이었다. 현대전의 무전기와 비슷한 당시에는 가장 발달한 긴급통신기 역할을 한것이다. 화성봉돈은 성벽 일부를 밖으로 돌출시켜 화강석으로 기초를 쌓았고, 윗부분은 벽돌로 성벽보다 높게 축조하였고 내면은 3층으로 만들고 신호를 알릴 수 있는 5개의 화두를 곡선 형태로 쌓았으며 적군의 공격에도 대비해 포혈과 총안을 갖췄다. 봉수대에 근무하는 봉수군들은 화성 행궁과 주변을 정찰하다가 낮에는 연기, 밤에는 불을 피워 위험을 알리는 신호를 보냈는데, 용인 석성산의 봉화가 응답하고, 그를 이어받아 서해안 홍천대 봉화가 대답했다
신호체계는 남쪽 첫번째 화두부터 시작하여 평상시에는 밤낮으로 봉수 1개를 올리고,
적군이 국경 가까이 나타나면 봉수 2개, 국경에 이르면 3개, 국경을 침범하면 4개, 전투를 시작하면 봉수 5개를 모두 올렸다고 한다.
포루
포루
치성 위에 설치한 누
군사들의 대기 및 휴식 장소이자 유사시엔 감시와 공격을 위해 쓰이기도 한 누각이다.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각 부분부터 벽돌로 축조하였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자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을 만들었다.
볕 좋은 가을길, 가볍게 걷기 좋다..
치(雉)
수원화성은 성곽을 쌓을 때에도 어떻게 하면 적의 공격을 잘 견뎌낼까 실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했다.
종전에는 성곽을 쌓는 무사석 표면을 되도록 크게 보이게 앃았는데, 이렇게 쌓을 경우 무사석 면적이 많이 노출되어
포탄을 맞으면 돌 전체가 깨져 쉽게 무너져 내릴 확률이 높았다고 한다.
그래서 수원화성의 성곽을 쌓을 땐 무사석을 90도로 돌려 긴 쪽을 적심 속에 넣고 좁은 단면을 노출시켜
포탄을 맞아도 뿌리가 깊어 무너지는 면적이 줄게끔 설계하였다.
돌과 돌이 맞이음하는 돌 각담법을 사용하여 서로가 맞물고 있는 힘이 강해
포격을 맞아도 피해가 적도록 과학적으로 설계되었다..
장엄하다..
창룡문
창룡문(蒼龍門)은 성의 동문이다.
이름은 음양오행설에서 푸를 '창'자가 동쪽을 의미한다는 데에서 이름이 유래하였다.
한국전쟁 당시 크게 소실된 것을 1978년 복원하였다. 홍예의 크기만을 놓고 볼 때는 장안문보다 더 크다.
서남으로 행궁과 1,040보 떨어져 있고, 안팎으로 홍예를 설치하였는데,
안쪽은 높이가 16척 너비가 14척, 바깥쪽은 높이가 15척 너비가 12척, 전체 두께는 30척이다.
안쪽 좌우의 무사는 각각 아래 너비가 30척 높이 18척 5촌이며, 좌우의 와장대(臥長臺)는 길이가
각각 20척이고 돌계단은 각각 14층이며 너비는 9척이다.
바깥쪽 좌우 무사의 너비는 각각 25척 높이는 18척이며, 안팎 홍예 사이의 좌우 무사는 높이가 각각 17척,
양쪽 선문 안은 쇠로써 빗장을 설치하였다.
창룡문과 마주하다..
동북공심돈
동북공심돈(東北空心墩)은 창룡문의 근처에 있는 공심돈으로, 서북공심돈과 남공심돈과 달리 성벽을 쌓은 안쪽에 건조되었다.
이 공심돈은 동심원 형태의 건축물이다.
높이는 17척 5촌(5.42m), 바깥 원 둘레 122척(38m), 벽돌로 된 부분의 두께 4척(1.24m), 안쪽 원 둘레 71척(22m),
내원과 외원 사이에 가운데 4척 5촌(1.39m)의 공간을 비워두고, 내부에는 나선형의 계단을 설치하였고 2층 덮개판으로 둘렀다.
아래 층 높이는 7척 3촌, 가운데 층 높이는 6척 5촌인데, 모두 군사들의 몸을 숨길 수 있게 하였다.
아래층 공심에서 나선형의 벽돌 계단으로 윗층의 집을 이르기 때문에 '소라각'이라고도 불린다.
동북공심돈.. 가까이에서 본 모습..
우직한 녀석..
동장대
연무대라고도 한다. 지형상 높은 곳은 아니지만 사방이 트여 있고, 등성이가 험하게 높이 솟아 있는 곳으로
동쪽구릉인 선암산(仙巖山)의 요지이자 성 중에서 지휘소를 설치할 만한 요충지이다.
3단으로 쌓은 대가 있고, 3층의 대에서는 총수(銃手)가 숨어서 쏘기에 편리하게 하였다.
한가운데에는 좌우에 와장대(臥長臺)를 설치하고 흙을 판판하게 하였으며, 바닥을 돌로 깔아 말을 타고도 장대에 올라갈 수 있게 하였다.
장대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의 합각기와지붕이다.
건물 주변에는 터를 넓게 잡아 동서 80보, 남북 240보 규모의 조련장(操鍊場)을 만들었다.
부속사(附屬舍)는 창고로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단층 3량 집이다.
성벽 밖으로 돌출된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1795년(정조19) 7월 15일 묘시(卯時 6시)에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8월 10일에 상량하고, 8월 25일에 장대 건물을 완공하였다.
스토리가 있어 즐거운 시간..
동남각루
동남각루(東南角樓)는 남수문 바로 옆에 있으며,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성벽이 꺾인 모퉁이에 있어서 주위를 관찰하기가 쉽다.
1796년 (정조 20년) 7월 25일에 준공되었다.
방화수류정
용연이라는 연못위에 있는 방화수류정은 그 주변경관이 빼어나다.
1794년(정조18) 수원 천도를 위해 화성(사적 제3호)을 축조할 때 성곽 위에 꾸며졌던 정자와 누각 가운데 하나로,
높은 벼랑 위에 평면 구성의 정교한 건물은 뛰어나게 아름답다.
방화수류정은 수원 화성의 네 개의 각루 중 동북각루의 이름이다.
이것은 1794년(정조 18) 수원 화성(華城, 사적 제3호)을 축조할 때 화성의 동북쪽에 군사지휘소부로 만들었던 각루로,
화성의 북수문인 화홍문(華虹門)의 동측 구릉 정상 즉 용연(龍淵) 남측에 불쑥 솟은 바위 언덕인 용두(龍頭) 위에 있다.
각루의 이름은 중국 송나라의 시인인 정명도(程明道)의 시 중 ‘운담풍경근오천(雲淡風輕近午天),
방화수류과전천(訪花隨柳過前川)’에서 따왔다고 하며, 현판의 글씨는 근대의 서예가 김기승(金基昇)이 썼다.
2011년 3월 3일에 보물 제1709호로 지정되었고, 수원시청에서 관리하고 있다.
방화수류정에서 쓴 정조대왕의 시가 전한다.
歷遍春城日未斜(역편춘성일미사) 춘성을 두루 보고도 해가 아직 한창이라
小亭雲物轉晴佳(소정운물전청가) 소정의 풍경은 한결 더 맑고 아름다운데
鑾旂慣報參連妙(난기관보삼련묘) 난기가 계속 삼련의 적중함을 보고하니
萬柳陰中簇似花(만류음중착사화) 수많은 버들 그늘 속에 살촉이 꽃 같구려
동북포루
방화수류정을 뒤로 하면 언덕 꼭대기 부분에 위치하고 있는 동북포루를 볼 수 있다.
성벽이 지형을 따라 꾸불거리며 상승하듯 언덕배기를 달린다..
성곽의 굴곡이 아름답다..
10월, 가을의 한가운데서 화성(華城)은 억새로 손짓하며 찾는 이의 마음을 좀 더 영글게 한다.
군사시설물인 성곽에 심어진 억새는 불화살 재료이기에 단순히 조경용으로 심어진 것이 아니라
성곽 복원의 일환이라 하니, 그 세심함에 놀라웠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인 수원화성에 가을이 왔다.
화성은 가을과 잘 어울린다고들 한다..
가을 하늘의 아름다움과 바람의 여유, 억새와 어우러지는 누각들..
이 곳에 와보니 고개가 끄덕여 진다..
화홍문(오른쪽)이 그 뒷모습을 보여준다..
용연에서 방화수류정, 화홍문, 동북포루를 바라보는것도 즐거운 일이다
용지와 용두암 이야기가 있는 '용연'
방화수류정 앞에는 용연이라는 연못이 있다. 사실 방화수류정이 자리잡고 있던 곳은 바위로 용두암이라고 불렸다.
주변에 수원천이 흐르는 아름다운 경치를 돋구기 위하여 이 방화수류정 앞에 연못을 파서 용지(龍池, 용의 연못) 혹은 용연이라고 했다고 한다.
화홍문
화성팔경중 제일 아름다운 곳.. 죽기전에 가봐야할곳 100곳중 하나이다....
화성에 오면 꼭 들러봐야 할 장소이다.
화홍문은 원화성의 북수문이며 남북으로 흐르는 수원천의 범람을 막아 주는 동시에 방어적 기능까지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쌓은 다리 위에 지은 문이다.
7개의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누각으로 지어져 있으며 누각의 건축면적은 52.89㎡이다.
누상에 오를 때에는 좌·우 측면에 있는 돌 계단을 이용한다.
7개의 홍예문 중에 중앙의 1칸만이 높이와 폭이 크고 나머지는 모두 같다.
수문의 바깥쪽에는 철전문을 설치하여 적의 침투를 막았다.
7개의 수문을 통하여 맑은 물이 넘쳐 흘러 물보라를 일으키는데, 현란한 무지개가 화홍문을 한층 더 아름답게 한다.
이를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하여 수원 8경 중에 하나로 꼽는다.
1794년(정조 18) 음력 2월 28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여 1795년(정조 19) 정월 13일 문루가 준공되었다.
장쾌한 멋..
가족과, 연인과 걷기에 사랑스러운 길들..
장안문
장안문
수원 화성 장안문장안문(長安門)은 화성의 북문이자 정문이다.
보통 성(城)의 남문을 정문으로 삼으나, 화성은 임금을 가장 먼저 맞이하는 북문인 장안문이 정문이다.
잘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은 석축에 홍예문을 냈고 그 위에 정면 5칸 측면2칸의 다포양식으로 이루어진 중층의 문루가 세워져있다.
또한 가운데에 홍예문이 나있는 벽돌로 쌓은 옹성이 있으며, 양옆에 다른 성벽보다 높이가 약간 높은 두개의 적대를 설치하였다. 장
안문의 이름은 중국의 옛 왕조인 전한(前漢), 수(隋), 당(唐)나라의 수도였던 장안(현재의 시안 시)에서 따온 것으로
이는 당나라 때의 장안성처럼 화성 또한 융성한 도시가 되라는 정조의 뜻이 담겨 있다.
4대 성문 화성에는 동서남북으로 동문, 서문, 남문과 북문 등 4개의 성문이 있다
장안문의 곡선이 아름답다..
조망이 시원하다..
북서포루
포루는 성벽의 일부를 바깥으로 튀어나오게 만든 치성 위에 지은 목조건물로
화포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며 군사들이 망을 보면서 대기하는 곳이다.
북서포루는 화성의 5개 포루중 하나이며 화서문과 장안문 사이에 위치한다
화성기적비
화성성역이 끝난 후 1797년(정조 21)에는 왕명에 따라 현륭원을 화산으로 옮기면서부터 화성성역이 완료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중신 김종수가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를 작성하였다. 그러나 왕의 재가가 난 후에도 담당 관리들이 계속 바뀌는 터에
비석으로 세워지지는 못하고 의궤에만 남아있었다. 현재 장안문 서편의 장안공원에는 화성기적비가 세워져 있는데,
이는 1991년 12월에 수원시장 명의로 건립한 것이다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
서북공심돈(西北空心墩)은 화서문 북치(北稚) 위에 있으며, 1796년 (정조 20년) 3월 10일에 완공한 공심돈이다.
성곽과 전축 및 누각 모두 거의 축조 당시의 완형(完形)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치의 높이는 15척(4.25m)이며 서북 2면에 각각 현안(懸眼) 두 개를 내었고, 그 위에 벽돌을 사용하여 네모지게 높이 쌓고 그 속을 비게 하였다.
벽축의 높이는 18척(5.58m)이고, 아래의 네모난 넓이는 23척(7.13m) 위의 줄어든 네모난 넓이 21척(6.51m)이다.
내부는 3층으로 꾸며 2층과 3층 부분은 마루를 깔았고, 사다리를 설치하여 위아래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돈대의 꼭대기에는 포사를 지었으며, 돈대 외벽에는 총안, 포혈(砲穴) 등을, 상층의 벽면 위쪽 판문(板門)마다 각각 전안(箭眼)을 뚫었다.
아래층 내면에는 벽돌로 홍예를 튼 작은 문을 내어 출입하도록 하였다.
서북공심돈의 성벽 높이는 약 5m이고, 전축 부분은 성 위에서 5.14m, 처마 높이는 성 위에서 도리 밑까지 6.27m이다.
2011년 3월 3일 보물 제 1710호로 지정되었다.
수원화성 4대문중 서쪽 화서문과 그 주변,, 갈대밭
화서문은 화성의 4대문 중 서쪽 대문으로 1795년 정조19년 공사를 시작하여 1796년 공사를 마쳤다.
화성 서쪽의 남양만과 서해안 방면으로 연결되는 통로 역할을 하였고 원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403호로 지정되어 있다.
편액은 초대 화성유수였던 채제공이 썻으며 옹성 안 홍예문 좌측 석벽에는 성문공사를 담당하였던 사람과 책임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화서문에서 서장대로 오르는 나지막한 산길은 억새로 가득합하다..
서장대가 가까이 다가온다..
서장대
경기도 수원시 팔달산 정상에 있는 서장대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으로서 상층은 정면과 측면이 각각 1칸의 모임지붕으로 되어 있다.
뒤편에는 8면의 노대(弩臺: 서노대)를 세웠는데, 이곳은 쇠뇌를 쏘는 군사인 노수(弩手)가 머물던 곳이다.
또한 현재는 복원이 안됐으나 후당(後堂) 3칸을 지었다.
서쪽 두 칸은 온돌이고, 동쪽 1칸은 판자를 깔았다. 모두 창과 분합문을 설치하고 단청을 하였다.
이곳은 성의 안팎이 모두 한눈에 들어와, 화성 성곽 일대는 물론 이 산을 둘러싸고 있는 백 리 안쪽의 모든 동정을 파악할 수 있다.
1794년(정조 18) 8월 11일 터 닦기 공사에 착수하였고, 9월 16일에 상량하고,
9월 29일에 완공되었다. 정조가 '화성장대(華城將臺)'란 편액을 직접 썼다.
200년 역사를 고이 간직하고 있는 전체 길이 5.7㎞의 화성성곽순례길..
정조의 효성과 꿈이 담긴 화성의 역사를 만날 수 있으며
과학적으로 건축되어 후손들에게 볼거리와 안식을 제공해주는 수원화성..
그 행복한 길 걷기는 누구라도 다시 찾고 싶은 길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성곽으로 조선시대 성곽의 꽃이라고들 하는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여행이었다..
하루 정도 일정을 잡으면 천천히 화성을 걸으면서 다양한 건축물과 주변의 풍경들을 구경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야경이 아름답다하니, 다음에 다시 찾을땐 꼭 야경을 담아봐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