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당풍경

시복감사미사

박태문 2014. 10. 7. 17:55

 

 

 

*시복감사미사*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집전으로 124위 순교자들이 시복되었다.

복자들 중 부산교구복자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의

시복에 감사하는 교구의 감사기념식 및 미사가

2014년 9월 27일에 부산 사직실내체육관에서

교구장을 비롯한 신부님들과

수많은 성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하게 봉헌되었다.

 

 

 

 

 

부산교구복자 이정식 요한과 양재현 마르티노

 

 

 

 

미사 준비가 한창이다..

 

 

 

 

 

 

 

 

손삼석 요셉 주교님(좌) 황철수 바오로 주교님(우)의 모습..

 

 

 

 

개막 팡파레 - 태평소 연주

 

 

 

 

순교자 찬가 : 연합성가대

 

 

 

 

 

 

 

 

축하공연 : 광안,  남천, 이기대성당 주일학교 100명의 어린이

 

 

 

 

 

 

 

 

 

 

 

 

기념 공연 :  아, 복자 이정식,  양재현! 

모듬 북과 춤공연, 천주가사가 체육관에 울려 퍼졌다..

 

 

 

 

순교의 기억..

 

 

 

 

 

 

 

 

 

 

 

 

 

 

 

 

 

 

 

 

 

 

 

 

 

 

 

 

 

 

 

 

미사집전 사제단과 주교단 입장

 

 

 

 

 

 

 

 

 

 

 

 

 

 

 

 

 

 

 

 

 

 

 

 

제대에 향치기

 

 

 

 

미사 시작 기도

 

 

 

자리를 가득 메운 성도들..

 

 

 

 

 

 

 

 

 

 

 

 

 

 

 

 

 

 

 

 

 

 

 

 

 

 

 

 

 

 

 

 

 

 

 

 

 

 

 

 

주교님의 강론..

 

 

 

 

"내 죽은 것을 산 것으로 아시고, 산 것을 죽은 줄로 아시며,

나를 잃은 것을 슬퍼하지 마세요"

 

이순이 루갈다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보낸 편지중 남긴 이 말이

가슴에 깊이 남아 자꾸만 맴돈다..

 

유중철(1779∼1801)·이순이(1782∼1802)는 자신들을 온전히 하느님에게 바치고자 결혼 뒤에도 동정을 지킨 부부로 유명하다. 

순교 당시 고작 20세에 불과한 이순이 루갈다..

오늘날의 20세는 어떤 생각들을 하며살까?

 

 

 

 

 

 

미사 예물 봉헌

 

 

 

 

 

 

 

 

 

 

 

 

 

 

 

 

 

 

 

 

 

 

 

 

 

 

 

 

 

 

 

 

<복자 이정식(요한)과 양재현(마르티노)의 신앙생활과 순교 역사>

 

 


  이정식 (요한)

  출생년도 : 1795
  성별 : 남
  출생지 : 경상도 동래
  직업 : 장교
  순교연령 : 73
  순교일 : 1868. 9.
  순교지 : 경상도 동래

이정식(李廷植) 요한은 경상도 동래 북문 밖에 살던 사람이었다. 그는 젊었을 때 무과에 급제한 뒤 동래의 장교가 되었으며,

 많은 사람들에게 활 쏘는 법을 가르친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이 59세 때 교리를 배워 천주교에 입교한 뒤로는 첩을 내보내고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하였다.

 

요한은 이후 가족들을 열심히 권면하여 입교시켰으며, 누구보다 수계에 열심이었다. 화려한 의복을 피하고,

항상 검소한 음식을 먹었으며, 애긍에 힘쓰면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또 작은 방을 만들어 십자고상과 상본을 걸고 묵상과 교리 공부에 열중하였다.

이러한 열심 때문에 요한은 입교한 지 얼마 안되어 회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언제나 자신의 본분을 다하였다.

그러던 중 1866년에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가족들과 함께 기장과 경주로 피신하였다가 다시 울산 수박골로 피신하여 교우들과 생활하였다.

1868년 이정식 요한 회장은 동래 교우들의 문초 과정에서 그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자 동래 포졸들은 그가 사는 곳을 수소문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는 그의 거주지를 찾아내 그곳에 있던 교우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그때 요한의 아들 이관복(프란치스코)과 조카 이삼근(베드로)은 요한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포졸들 앞으로 나와 자수하였다.

이내 동래로 압송된 요한 회장은 그곳에서 대자 양재현(마르티노)을 만나 서로 위로하며 신앙을 굳게 지키자고 다짐하였다.

그리고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지목되어 문초를 받게되자, 요한은 천주교 신자임을 분명히 하고는 많은 교우들을 가르쳤다는 것도 시인하였다.

그러나 교우들이 사는 곳만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았다. 또 형벌을 받으며 배교를 강요당하였지만 끝까지 굴복하지 않았다.

요한과 동료들은 문초와 형벌을 받은 뒤 47일 동안 옥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을 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신앙을 버리고 석방된 사람은 없었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사형을 맡은 군사들이 부자를 한날에 죽이는 것을 꺼려하자, 동래 관장은 동시에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였다.

요한은 참수형을 당하기에 앞서 삼종 기도를 바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당시 그의 나이는 74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

    출생년도 : 1827
    성별 : 남
    출생지 : 경상도
    직업 : 좌수
    순교연령 : 41
    순교일 : 1868. 9.
    순교지 : 경상도 동래

1827년에 태어난 양재현(梁在鉉) 마르티노는 언제부터인가 경상도 동래의 북문 밖에서 살았다.

그는 동래에서 좌수(坐首)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이정식(요한) 회장을 만나면서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 그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1868년의 박해 때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알려져 동래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당시 그는 포졸들이 집으로 들이닥치자 태연하게 그들을 맞이한 뒤 관아로 끌려갔다.

이윽고 관장 앞으로 나가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마르티노는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는 형벌을 달게 받았다.

또 관장이 배교를 강요하자, “절대로 천주교 신앙을 버릴 수 없다.”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런 다음 오랫동안 옥에 갇혀 있다가 다시 문초를 받고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양재현 마르티노는 수군의 병영에서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배교를 거부함으로써 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옥에 들어가서는 옥졸의 꾀임에 빠져 ‘돈을 주겠다’고 약속한 뒤 몰래 그곳을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옥졸은 마르티노가 집으로 돌아가자 관장에게 가서 ‘죄수가 몰래 도망쳤다’고 거짓으로 보고하였다.

이내 포졸들이 다시 마르티노의 집으로 몰려왔고, 그는 즉 체포되어 동래 관아로 압송되었다.

마르티노의 신앙심은 이때부터 다시 굳건해지게 되었다.

그는 혹독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천지의 큰 부모이신 천주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이후 마르티노는 통영에 있는 수군의 병영으로 이송되어 여러 차례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동래 관아로 끌려와 옥중에서 이정식 회장과 동료 교우들을 만나게 되었으며,

서로를 위로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동래 관장은 마침내 사형을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있는 신자들을 끌어내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로 압송하였다.

이때 마르티노는 끝까지 배교를 거부하고 십자 성호를 그은 다음에 칼을 받았으니, 그때가 1868년 여름으로, 그의 나이 41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져 사형장 인근에 안장되었다.       <출처: 천주교부산교구 홈페이지>

 

 

 

 

 

<이정식과 양재현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배경>

1966년 병인박해 순교자 24위가 시복될 때 이정식과 양재현이 빠지는 안타까움이 있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광안성당을 순교자 성당으로 지정하고, 인근 수영 장대골에서 순교한 이들의 현양을 시작하였다.

1977년 문헌 연구와 현장 조사를 통해 장대골 순교터를 확인하고 장대돌을 찾아 안장하였다.

1986년 광안성당에서 순교터로 추정되는 162평을 매입하였고, 1988년 순교자 현양위원회에서는 순교 성지를 단장하여

기림비를 세우고 축성식을 가졌다. 이후 매년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7월5일)에

교구사제단 주관으로 순교자현양미사를 봉헌하고 있다.

부산교회사연구소가 설립된 이후 수영 장대골 순교자들의 시복청원을 위한 학술연구를 시작하였다.

3년에 걸친 연구 성과로 『조선후개 동래 지역사회의 엘리트와 천주교 수용자들 그리고 이에 관한 고문서 』(이훈상,손숙경,

민선희 편저)를 발간하면서, 시복작업의 토대를 만들었다.

1990년대 초반에 교구별로 시복청원 작업이 시작되면서 문제점들이 노출되었다.

각 교구 담당자들이 몇 년에 걸쳐 여러 번 회의를 하며 한국교회 차원으로 통합하자는 의견을 모아 주교회의에 제출하였다.

주교회의를 통해 시복통합 추진이 결정되고, 2001년 주교회의 춘계 정기총회에서 시복 시성 추진 담당에 박정일 주교를 선출하고,

시복건을 시성성에 알렸다. 2002년 9월4일 시성성에서 하느님의 종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 123위”에 대한 시복건이 받아들여졌고

2003년 10월에는 이들에 대한 “장애없음”을 통보받았다. 이때 이정식 요한(116위)과 양재현 마르티노(117위)가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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