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왕릉 4> 무열,김양, 김인문

박태문 2019. 11. 4. 13:14






태종무열왕릉(사적 제20호)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재위 654~661)을 모신 곳으로 선도산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끝에 위치해 있다.

  무열왕의 이름은 김춘추로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활발한 외교활동을 펼치고 내정개혁을 주도하여

김유신과 함께 삼국통일의 기반을 닦았으며, 왕권을 강화하였다.

  654년 진골 출신으로는 처음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당과 연합하여 660년에 백제를 아울렀으나

 삼국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이듬해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무열이며 신라 왕중에서는 유일하게 태종이라는 묘호를 받았다.





비교적 평야지역에 위치한 왕릉과 주위의 소나무들이 인상적이다






태종무열왕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것으로 왕릉 좌측에 위치하고 있다.


현재 비의 몸돌은 없어지고 거북 모양의 받침돌과 용을 새긴 머릿돌만 남았다. 

 받침돌에 조각된 돌 거북은 목을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머릿돌의 좌우에는 여섯마리의 용이 서로 세마리씩 뒤엉켜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을 조각하였다.

  앞면 중앙에는 무열왕의 둘째 아들 김인문이 쓰니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이 돋을새김되어 있어 비의 주인공을 밝혀주고 있다. 

 이 비는 표현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 우리나라뿐만아니라 동양권에서 가장 뛰어난 걸작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이다.





김양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33호. 지정면적 7,867㎡. 김양은 태종 무열왕의 9세손으로 김주원()의 증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여()이다.

그는 828년(흥덕왕 3)에 고성군() 태수를 지낸 후 중원소경()의 장관과 무주도독()을 역임하였다.

흥덕왕 사후 김균정()을 도와 왕위쟁탈전에 참여하였으나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 의탁해 있다가

 839년에 청해진의 군사를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민애왕을 시해하고 신무왕을 즉위시켰다.

그 공으로 김양은 창부령()에 임용되었고 이어서 시중() 겸 병부령()에 임명되었으며 그의 딸을 문성왕에게 시집보냈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는 서발한()에 추증되고 김유신의 예에 따라 장례를 치르었으며 태종 무열왕릉에 배장()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태종 무열왕릉 앞쪽 약 15m지점에 있는

 2기의 원형봉토분 중 규모가 작고 무열왕릉과 가까운 위치의 둘레 약 60m, 직경 20m, 높이 3.5m의 원형봉토분을 김양의 묘로 비정하고 있다.






김인문묘


1982년 8월 4일 경상북도기념물 제32호로 지정되었다.

신라의 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김인문의 묘이다.

태종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김양묘(경북기념물 33)와 나란히 있다.

밑지름 23m인 원형 봉토분()으로, 높이는 4m 내외이며 봉분 아랫부분에는 지름 30cm 내외의 할석이 노출되어 있다.

묘 주위에는 별다른 석물은 없고 다만 북쪽에 정면 1.5칸 측면 1.5칸의 사각지붕을 한 비각이 있다.

비각 내부에는 비신과 이수가 없는 귀부, 즉 경주서악리귀부(보물 70)가 목을 뽑아 들고 멀리 앞을 바라다보고 있다.

김인문은 태종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며 문무왕()의 친동생이다.

651년(진덕여왕 5)부터 당나라에 일곱 차례나 왕래하며 당나라와의 외교에 큰 역할을 하였다.

삼국통일 전후하여 당나라의 힘을 빌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글씨에도 재주가 있어 태종무열왕의 비문을 직접 쓸 정도였다.

김인문은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694년(효소왕 3)에 죽었는데 당() 고종()은 그의 관을 신라로 호송하여 보냈다.

효소왕은 김인문에게 태대각간()을 추증()하고 이듬해에 지금의 자리에 장사지내게 했다.

묘비는 인왕동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