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31> 불국사
불국사
답사일 : 2018년 6월 12일
불국사는 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751년 김대성이 이 절을 창건했다고 한다.
창건 이후 여러 차례의 중창과 중수를 거쳤으며 현존하는 주요건물들은 대체로 임진왜란 이후 복구된 것이다.
불국사는 신라인이 염원한 이상의 불국토를 3갈래로 구현한 것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석가의 사바세계는 대웅전으로,
〈무량수경〉에 근거한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는 극락전으로, 〈법화경〉에 근거한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는 비로전으로 대표된다.
즉 불국사의 경내는 석단에 의하여 단상의 불국토와 단하의 속계로 양분된다.
석단 위에 청운교·백운교, 칠보교·연화교라는 2쌍의 다리를 놓았다.
대웅전 앞에 있는 3층석탑과 다보탑은 쌍탑구조이다.
극락전에는 금동아미타불좌상을 안치했으며, 무설전 뒤에는 관음전이 있다.
불국사 입구로 들어선다.
입구에 위치한 약 100년된 소나무의 자태가 멋스럽다.
불국사 안에 있는 여러 불상과 불당, 탑 등은 최고의 기술과 웅장함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보물들이 많다.
사천왕은 불교에서 수미산 중턱에 있는 사왕천의 주신인 불법을 수호하는 네명의 외호신이다.
사천왕은 각각 동,서,남,북쪽을 수호하는데
* 남쪽은 증장천왕- 그는 자신의 위덕을 증가하여 만물이 태어날 수 있는 덕을 베풀겠다는 서원을 세움, 용과 여의를 쥐고 있는 모습(사진 좌)
*서쪽은 광목천왕- 입을 크게 벌린 형상을 함으로써 웅변으로 온갖 나쁜 이야기를 물리치는 신, 끝이 셋으로 갈라진 삼차극과 보탑을 쥐고 있음(사진 우)
* 북쪽은 다문천왕- 항상 부처님의 도량을 지키면서 부처님의 설법을 듣는다 하여 다문이라함, 비파를 들고있음(사진 좌)
*동쪽은 지국천왕- 선한자에게 상을 주고 악한 자에게 벌을 주어 인간을 고루 보살피며 국토를 수호하는 신, 손에 칼이 있는게 특징(사진 우)
범영루
범영루(泛影樓)는 처음에는 수미범종각(須彌梵鐘閣)이라고 불렀다.
수미산 모양의 팔각정상에 누를 짓고 그 위에 108명이 앉을 수 있게끔 하고,
아래에는 오장간(50자 높이의 칸)을 세울수 있게끔 하였다고 한다.
108명이 앉을 수 있게 한것은 불교의 백팔번뇌를 상징하는 것으로
많은 번뇌를 안을 중생들을 의미한다.
범영루는 841년에 창건되고 1593년 임진왜란 때에 왜구들에 의하여 불탄 것을
조선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지었다가 1973년 복언공사 때 지금의 모습으로 중건되었다고 한다.
누각의 모습이 소나무와 조화가 좋다..
대웅전으로 들어서는 정문과 연결된 청운교와 백운교는 인간의 세계와 부처의 세계를 이어주는 다리이다.
이밖에도 금동 아미타여래 좌상, 연화교와 칠보교, 사리탑 등 불국사 안에는 여러 가지 보물로 가득하다.
경주 불국사 청운교 및 백운교
국보 제23호. 석가모니의 불국세계로 통하는 자하문으로 오르는 다리인데,
33계단은 33천을 상징하는 것으로 헛된 욕망을 버리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걸어 올라가는 다리라고 한다.
거의 45°로 경사가 져 있기 때문에 연화교·칠보교보다 남성적이며 웅장하고 장대한 느낌을 준다.
다리 아래쪽의 홍예는 U자를 거꾸로 놓은 듯한 모습인데 한국 돌다리 홍예의 시원 형태를 보여주는 것으로
옛날에는 구품연지로 흘러드는 물이 이 아래를 통과했다고 한다.
751년 불국사의 창건 때 세워져 1686년과 1715년에 중수되었고, 1973년 난간을 복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다음백과)
청운교 및 백운교..
10원짜리 동전에 새겨져 있어 더욱 익숙한 다보탑의 모습이다.
불국사다보탑(통일신라), 국보 제20호, 높이10.4m
〈법화경〉의 〈견보탑품 見寶塔品〉에 근거하여 건립된 것으로 다보여래를 상징하는 탑이다.
〈견보탑품〉은 다보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설하는 석가여
래를 찬양하자 석가여래가 자리 한쪽을 비워 나란히 앉게 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불국사의 두 탑은 석가·다보 여래를 상징하며,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쌍탑의 하나이다.
이형 석탑이지만 탑의 기본적인 구조를 그대로 따라 기단부·탑신부·상륜부로 이루어졌으며
정사각형의 기단은 사제와 8정도의 근본도리를 밝힌 것이고, 1층부터 보주까지는
10지의 등각·묘각을 상징한 것으로 탑 자체가 불(佛)임을 나타낸 것이다.
하층기단의 4면에는 계단이 있고 양쪽에 난간의 석주로 보이는 유구가 서 있다.
상층기단에는 4개의 우주와 중앙에 탱주가 서 있으며, 우주 위에는 2단의 두공이 십자형으로 놓여 있고 그 위에 갑석을 올려놓았다.
갑석 위에는 8각형의 신부가 3단 있는데 하단은 4각형의 난간 속에 별석을 돌렸고,
중단은 8각 난간 속에 죽절형의 기둥을 세웠고, 상단은 8각 앙련 위에 꽃술형 기둥 8개가 8각의 신부를 돌려싸고 있다.
옥개석도 역시 8각이며 그 위에 노반·복발·앙화·보륜·보개로 이루어진 상륜부가 있다.
1925년 일본인들에 의해 해체·수리되었으나 이때 발견된 유물은 현재 행방을 알 수 없다.
탑 사방의 보계가 마련된 갑석 위에 있던 4마리의 사자상은 현재 1마리만 남아 있다.
(출처: 다음백과)
대웅전
대웅전은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조선 세종 18년(1436년)에 중수하였으며,
성종 21년(1490년)과 명종 19년(1564년)에 중수가 있었으나, 선조 26년(1593년)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
그 후 효종 10년 (1659년)에 중창된 후 숙종 3년(1677년) 번와 보수, 숙종 34년(1708년) 서쪽 기둥 교체,
영조 5년과 영조 6년(1730), 영조 7년에 개와(蓋瓦)를 보수하였다.
조선 영조 41년(1765년, 乙酉)에는 대웅전을 중창하고, 영조 41년(1767년) 단청이 완료되었으며,
이후 대웅전의 삼존불과 후불탱(後佛幀)을 영조 45년(1769년)에 완성하였다.
그 후 퇴락된 것을 일제 강점기인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조선총독부 주관으로 개수한 바 있으며,
이어 1934년부터 1936년 사이에도 개수되었다. 그 뒤 또 다시 심하게 퇴락되어 가던 것을
1970년 대에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지시로 중창되었다.
(출처: 문화재청)
대웅전 전면에는 팔각을 기본으로 한 전형적인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 삼층 석탑.
불국사3층석탑(통일신라), 국보 제21호, 높이10.4m
석가탑 또는 무영탑이라고도 한다.
이 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가장 우수한 예이며,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과 상륜부가 있는데 각 부분의 체감비율이 적당하며 간결하다.
상·하 기단의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가 각각 2개씩 새겨져 있고 다른 조각은 없다.
탑신을 받치는 갑석은 4매의 돌로 되어 있는데 아래에는 부연이 있고, 윗면은 경사가 져 있으며 2단의 탑신 굄이 있다.
탑신부의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으며 옥신에는 우주가 새겨져 있을 뿐이다.
옥개석의 층급받침은 5단이며 그 위에는 2단의 옥신받침이 있다.
상륜부는 노반·복발·앙화만 남아 있었는데 1973년 실상사백장암3층석탑의 상륜부를 모방해 결실된 부분을 보충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 탑의 특이한 점은 탑 주위에 장방석을 돌려서 형성한 탑구에 연꽃무늬를 조각한
팔방금강좌가 있는 것과 탑의 기단부를 자연석이 받치고 있는 것 등은 유례가 드문, 주목할 만한 예이다.
해체수리 때 2층 옥신의 사리공에서 사리함과 여러 개의 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탑을 만들기 위해 신라로 건너간 남편 아사달은 탑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아내를 보지 않기로 다짐했다.
대웅전 전면의 동측에는 다보탑이, 서측에는 석가탑이 배치, 전면에는 통일신라 석등이 배치되어 있다.
대웅전 내부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5칸의 다포계 건물로 기둥을 생략한 내부 공간 구성 및 살미첨차의 초화문양(草花文樣)과 봉황(鳳凰)머리 조각,
평방에서 돌출된 용머리 조각 등 내·외부를 매우 화려하게 장식한 우수한 불전으로 그 가치가 크므로 국가문화재(보물)로 지정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발견된 석가탑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
불국사금동비로자나불좌상(통일신라), 국보 제26호, 높이 177cm
지권인은 본래 밀교에서 금강계만다라의 주존인 대일여래, 즉 마하비로자나가 취하는 수인으로
이때 대일여래는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영락으로 장식한 보살의 형태로 표현되는데,
이 불상처럼 나발이 있는 육계에 부처의 형상으로 지권인을 한 경우는 다른 나라에서는 유례가 없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일반적인 지권인과 달리 오른손은 아래로, 왼손은 위로 올라가 극락전의 아미타상처럼 두 손의 위치가 바뀐 것도 특이한 점이다.
얼굴의 표정 자체도 근엄하지만 넓은 어깨에 허리를 곧게 세워 배가 약간 나온 자세는 더욱 위압감을 준다.
두 무릎의 폭이 넓어 안정된 느낌을 주지만 허리가 길어지고 얼굴과 드러난 오른쪽 어깨의 살은 약간 탄력감을 잃은 듯하다.
왼쪽 어깨에서 흘러내린 옷은 불신에 밀착되어 허리와 배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데 도드라진 옷주름의 표현은 도식화된 편이다.
(출처: 다음백과)
조금은 더운 날씨였지만 푸르름과 어우러진 경내의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다.
경주 불국사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국보 제27호, 1962년 12월 20일 지정)
불국사 극락전에 모셔진 금동불로서 높이는 1.66m이다.
전체적으로 근엄하고 장대한 모습이며 신체나 옷주름도 비교적 사실적(寫實的)으로 표현하였다.
얼굴은 정면을 향하고 풍만하며 눈썹은 반원형이고 콧날은 오똑하다.
나발(螺髮)에 육계(肉髻)는 큼직하며,
떡 벌어진 어깨, 당당한 가슴, 불룩한 아랫배 등은 건강한 남성의 체구를 연상시킨다.
오른쪽 어깨는 가사를 벗었고 오른손을 가볍게 다리 위에 얹었다.
옷무늬가 웅혼하며 결가부좌한 두 다리는 신체에 비해 넓게 퍼져서 안정된 느낌을 준다.
목에는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일반적 특징인 삼도(三道)가 뚜렷하며,
수인(手印)은 아미타구품수인(阿彌陀九品手印) 중 하품중생인(下品中生印)을 하고 있다.
등 뒤에는 머리 배면과 두 어깨 아래에 신광과 두광을 부착시킨 흔적이 남아 있다.
곧은 몸과 단정하고 긴장감이 느껴지는 모습에서
통일신라 조각의 전성기를 지난 휴식기의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지며,
조성연대는 조형양식으로 보아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국보 제26호)과 거의 같은 80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국보 제28호)과 함께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으로 불린다.
(출처: 네이버지식백과)
불국사 종각
불국사 당간지주
(유형문화제 제446호)
대석단 앞에 동, 서 방향으로 당간지주 2쌍이 있는데 그 중 동편 당간지수이다.
전반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지만 하단에 풍화가 진행되어 훼손되어 있다.
약 천년간 서라벌, 금성 등으로 불리며 신라의 버팀목이 되어준 지금의 경주.
신라의 고유문화와 유물, 유적지 등을 끊임없이 발전시켰고 지금도 계속하여
그 흔적들이 발굴되고 있는 역사의 현장중에 신라의 혼과 정신이 담겨 있는 불국사를 답사했다.
불국사는 신라 사람들의 마음자세를 엿볼 수 있는 소중한 보물 그 자체이며,
그들만의 독특하고 차별화된 건축기술과 보존으로 세계문화유산으로도 등재되었다는 것은 큰 축복이다.
이를 보면서 우리나라의 민족으로서 더욱 자긍심을 갖게되는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