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29> 괘릉, 승복사지, 연지암
괘릉, 승복사지, 연지암
답사일 : 2018년 4월 24일
경주 원성왕릉
원성왕릉(元聖王陵)은 경주시 외동읍 괘릉리에 있는 능으로, 《삼국유사》의 기록에 따라 신라 38대 원성왕의 능으로 추정된다.
왕릉을 조성할 때 유해를 원래 이곳에 있던 연못의 수면 위에 걸어 안장하였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형태는 원형의 봉토분으로, 아랫부분에는 호석을 두르고 12지신상을 새겨 장식했다. 봉분의 지름은 약 23m이며 높이는 약 6m이다.
괘릉 입구에 있는 석상과 석주들이 조각수법이 매우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어 보물 제14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봉분 바로 앞에는 4각 석상이 놓였고 그 앞으로 약 80m 떨어진 지점부터 양 옆으로 돌사자 한쌍·문인석 한쌍·무인석 한쌍과
무덤을 표시해주는 화표석(華表石) 한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석조물들의 조각수법은 매우 당당하고 치밀하여 신라 조각품 중 가장 우수한 것으로 꼽히고 있는데,
특히 힘이 넘치는 모습의 무인석은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어 페르시아인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한다.
사자상..
익살스러운 표정이다..
서역인의 얼굴을 하고 있는 석상
원성왕릉은 낮은 구릉의 남쪽 소나무 숲에 있는 것으로 신라 제38대 원성왕(재위 785∼798)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며 내물왕의 12대 후손으로 독서삼품과를 새로 설치하고 벽골제를 늘려쌓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왕릉이 만들어지기 전에 원래는 작은 연못이 있었는데, 연못의 모습을 변경하지 않고 왕의 시체를 수면 위에 걸어
장례하였다는 속설에 따라 괘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출처: 문화재청)
무덤을 지키는 듯..
각종 석물에서 보여지는 뛰어난 조각수법은 신라인의 예술적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이 능은 원형 봉토분으로 지름 약 23m, 높이 약 6m이다.
흙으로 덮은 둥근 모양의 무덤 아래에는 무덤의 보호를 위한 둘레석이 있는데, 이 돌에 12지신상이 조각되어 있다.
원성왕릉의 무덤제도는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둘레돌에 배치된 12지신상과 같은 세부적인 수법은 신라의 독창적인 것이다.
한적함이 감도는 원성왕릉..
승복사지 삼층석탑(서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94호인 경주 숭복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신라시대 석탑의 일반적인 형식을 갖추고 있다.
이중기단 위에 기단부에는 팔부신중이 새겨져 있고 그 위에
삼층의 탑신이 있는 형태이다.
서쪽의 탑은 동탑에 비해 멸실이 심한 상태이고
2층과 3층의 탑신, 그리고 3층의 옥개석이 없다.
숭복사지 삼층석탑의 1층 탑신에는 문비가 새겨져 있고
옥개석의 네 귀퉁이에는 풍경을 단 듯한 흔적이 있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석탑양식을 띄고 있다고 전해진다.
동탑
2층 탑신과 상륜부가 결실된 상태이다.
승복사지 삼층석탑
파손이 심한 모습...
《사산비명》 중 하나인 <초월산대숭복사비>가 있었던 경주 숭복사터.
경주시가 2014년 복원한 비이다. 원래 귀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다고 한다.
‘초월산대숭복사비’의 비명(碑銘)은 최치원(崔致遠, 857~?)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입니다.
‘사산비명’은 서산 휴정 스님의 제자인 해안(海眼, 1567~?) 스님이 《고운집》에서 네 비문을 뽑아 엮은 데서 유래한 것으로,
‘숭엄산성주사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崇嚴山聖住寺大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銘)’,
‘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령탑비명(智異山雙溪寺眞鑑禪師大空靈塔碑銘)’, ‘
초월산대숭복사비명(初月山大崇福寺碑)’,
‘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曦陽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銘)’을 통칭하는 용어입니다.
사산비명은 신라말 고려초 불교와 역사, 문화, 정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대숭복사비’는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돼 귀부와 비석 조각 몇 개만 남아있습니다.
귀부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비석 조각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국립경주박물관에 있습니다.
지금 비는 올해(2014년) 2월 필사본으로 전해오던 비문을 교감하고 행렬을 맞추어 새로 조성한 것입니다.
글씨는 하동 쌍계사에 있는 ‘진감선사대공탑비’ 글자를 모아 새겼다 합니다. 비석의 전체 높이는 381cm입니다.
숭복사의 원래 이름은 곡사(鵠寺)였다 합니다. 곡사를 지은이는 파진찬 김원량인데,
그는 원성왕의 어머니 소문왕후의 외삼촌이자, 원성왕비 소문왕후의 외할아버지지요.
원성왕이 돌아가자 곡사에 능을 조성하고, 절을 지금의 숭복사지로 옮겼다 합니다. 그
뒤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보고 절을 크게 수리한 뒤 능침사찰로 삼았습니다.
헌강왕 11년(885)에 절 이름을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해에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습니다.
최치원은 헌강왕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진성(여)왕 10년(896)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 도움 글
1. ‘경주 신라 초월산대숭복사비’ 안내문
2. 한국금석문종합영상정보시
스템(http://gsm.nricp.go.kr) ‘숭복사비’
3.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encykorea.aks.ac.kr) ‘사산비명’
초월산 대숭복사비 복원할 당시 사정에 대하여 잘 기록되어 있다.
경주의 많은 폐사지 중의 한 곳,, 숭복사지..
활성리석불입상은 괘릉을 조금지나 좌측으로 조금 올라가면 연지암이 나오는데, 대웅전에 모셔져 있다.
연지암은 정면 5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 목조건물인 대웅전과 2동의 요사채로 이루어졌다.
일제 말엽 이 절의 창건주 김연지화 보살의 꿈에 밭 가운데서 목탁소리가 들려오는 현몽을꾸고
직접 가서 파보니 석불이 나왔고 연지암으로 모시고와 봉안하였다.
이를 안 일본군이 어디서 훔쳐왔느냐며 연지화 보살을 고문하기 시작했는데,
보살을 고문한 그 일본군은 그 자리에서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경주 활성리 석불입상(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6호)은 사진을 지워버려, 아쉽지만 다음에 올리는 것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