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28> 낭산2(능지탑, 중생사, 독서당, 황복사지), 구황동탑지

박태문 2018. 4. 25. 16:50




낭산2(능지탑, 중생사, 독서당, 황복사지), 구황동탑지


답사일 : 2018년 4월 17일









경주능지탑.. 이라고 쓰여진 비석

1982년 경북 시도기념물 제34호로 지정되었다.










경주 능지탑지


경북 경주시 남산에 흐트러져 있던 탑의 재료를 새로 맞추어 놓은 것으로 예로부터 능지탑 또는 연화탑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원래는 기단 사방에 12지신상을 새긴 돌을 세우고 그 위에 연꽃무늬가 있는 석재를 쌓아올린 5층석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재위 661∼681)은 임종 후 10일 내에 왕궁 밖 뜰에서 검소하게 화장하라고 유언하였는데,

탑 주변에서 문무왕릉비 조각이 발견되고 사천왕사, 선덕여왕릉, 신문왕릉과 이웃한 것으로 보아 문무왕의 화장터로도 추정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측면의 모습









1979년 기단부를 복원하고 상부는 그저 추측해서 쌓았다고 한다.









     


     


     


김유신장군묘에서 보았던 12지상을 세우고 연화문 석재로 쌓아올렸다.

12지신상 중에서 3개는 남아있지 않다.








 탑을 복원하다가 원형을 알 수 없어 돌을 옆에 쌓아뒀다고 하는데,
쌓아둔 돌의 크기와 무게를 보아 이 탑이 얼마나 대단한 탑인지 짐작할 수 있다.









더 많은 자료와 연구, 발굴이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중생사


창건 이후의 연혁은 전해지지 않고, 언제 폐사되었는지도 알 수 없다.

1940년대에 옛터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른다.

건물은 법당과 삼성각, 요사 2동이 있고, 유물로 보물 제665호로 지정된 낭산마애삼존불이 유명하다.

이외에 팔각원당형불좌대와 석탑 옥개석, 석조관세음보살상, 석탑 부재 등이 남아 있는데,

이중 석조관세음보살상의 불두()는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이곳에서 석조관음보살상이 출토되어
국립경주박물관 야외전시장에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중생사 마당 한 켠에 설명도 없이 덩그라니 놓여진 탑..










탑 옥개석과 석대좌등 석조 유물들이 늘어져 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석탑..










중생사는 오래되고 관리도 잘 안되어지고 있어 안타까웠다.










비로전...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는 곳이다











독서당 (讀書堂)


"독서당은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이 학문을 닦았던 곳이라 전해지는 곳이다.

건물은 정면 4칸 규모에 서향을 한 팔작지붕 구조이며, 이 곳에서 조사된 초석은 통일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석재를 비롯하여

조선시대의 석조물까지 보이고 있어 후대에도 보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담장 밖에는 철종 원년(1850년)에 건립된 유허비가 있다.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삼층석탑..

대한민국 국보 제37호이다.











황복사지 삼층석탑은 신라 효소왕이 그의 아버지 신문왕의 명복을 빌고자 세운 탑으로,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갖췄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만이 남아있다. 1943년 탑을 해체 수리하면서 2층 지붕돌 안에서

금동 사리함과 금동 불상 2구를 비롯하여 많은 유물을 발견하였는데,

그중 사리함 뚜껑 안쪽에 새겨진 명문 덕에 탑의 건립 경위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었다.

함께 나온 불상은 금제여래좌상금제여래입상으로 각각 국보 제79호와 제80호로 지정되어 있다.

(출처: 문화재청)










2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에는 우주와 탱주를 모두 갖추었는데, 모두 2주씩이어서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경주 고선사지 삼층석탑·경주 나원리 오층석탑 등의

대형 탑에 비하여 하층 기단의 탱주 수가 하나 줄어든 것이다.

 하층 기단은 지대석·중석·갑석을 각 8개씩 짜고, 상층 기단은 중석이 8개, 갑석을 4개로 덮어서 짜임새가 질서 정연하다.

탑신부는 각 층의 몸돌과 옥개석을 각각 한 개로 만들고, 몸돌에 우주가 있고, 옥개석 받침은 다섯 층을 두었다.

이후 이러한 양식이 한국 석탑의 기본이 되어 전형을 이루게 된다(출처: 문화재청)









둔탁함보다는 세련미가 느껴진다.









어느 건축물의 어느 부분일까..

아직 수습되지 않은 역사의 흔적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경주 낭산 추정 고분지 미완성 왕릉석재들..










줄을 맞추어 늘어놓았다..










경주 낭산 추정 고분지 미완성 왕릉석재


뉴스경북기사를 옮긴다.


<2017. 2.9(목) 오후 2시 조사현장 성과 설명회 및 출토 유물 공개>

가릉은 성덕왕의 둘째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孝成王, 742薨)으로 판단

 

(재)성림문화재연구원(원장 박광열)은 9일 경주시 낭산 추정 고분지에서 통일신라시대 가릉(假陵)이 발견됐다고 밝혔다.  

경주시의 의뢰로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발굴조사를 하고 있는 매장문화재 조사기관인 (재)성림문화재연구원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위치한 경주 낭산 일원(사적 제163호) 내 폐왕릉지로 추정되는 고분지 유적을 발굴조사했다.

 

이 유적은 금제여래좌상(국보 제79호)과 금제여래입상(국보 제80호)이 발견된 경주 황복사지 삼층석탑(국보 제37호)에서

남쪽으로 약 135m 지점의 논 경작지로서 이 일대는 오래전부터 홍수로 인해 파괴된 것으로 추정된 신라왕릉과 관련된

석재유물(면석, 탱석 등)들이 지상에 노출되어 있었다.

 

학계에서 신문왕릉, 성덕왕비인 소덕왕후, 효성왕비인 혜명부인, 민애왕릉 등의 폐왕릉지로 비정되거나,

의상의 탑돌이와 관련하여 황복사의 목탑지로 추정되고 있는 중요 유적지이다.

 

경주시에서는 이러한 유적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유적의 훼손을 방지하고 폐왕릉지에 대한 향후 복원‧정비를 위해 이번 발굴조사를 진행했다.

 

그 결과 신라 왕릉 조영에 사용될 탱석, 면석, 지대석, 갑석, 미완성 석재 등 다량의 석재가 확인되었으며,

 더불어 석재 주변으로 8~9세기가 중심연대인 건물지와 담장, 회랑지, 도로(너비 16~17m) 등과 함께 연화보상화문수막새,

귀면와, 습부정정(習部井井), 습부정정(習府井井), 정(?)원사(鄭元寺) 명 명문기와 등 300여점의 중요 유물이 출토됐다.

 

발견된 갑석과 지대석, 면석과 탱석으로 추정한 왕릉의 직경은 약 22m로 전경덕왕릉(765년)과 비슷한 규모이다.

 

조사 결과 출토된 왕릉 관련 석재 다수가 미완성인 점, 후대 조성된 8~9세기 건물지 시설에 재활용되어 사용 되었던 점,

석실 내부를 만들기 위한 부재가 확인되지 않은 점, 탱석의 십이지신상이 잘려나간 점 등 여러 정황으로 판단 할 때,

당시 왕을 위하여 사전에 능침 조영을 준비하던 도중 어떠한 사유로 축조공사를 중단하고 왕릉을 설치하지 않았던 가릉(假陵) 석물로 추정된다.

 

추정 왕릉 주인공은 발굴조사 결과와 십이지신상 형식으로 볼 때, 성덕왕의 둘째아들이자 경덕왕의 형인 효성왕(孝成王, 742薨)으로 판단된다.

 

조사된 건물지는 일반적으로 신라왕경에서 확인되는 주택이나, 불교 사원 건축과는 차이가 있어 관청(습비부 관련)이나

특수한 건물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도로유구는 신라 왕경내 현재까지 발굴조사 된 다른 도로보다 구조적으로 튼튼하게 설계된 것으로서 왕경의 남북대로와

 동서대로의 너비가 약 16~17m 정도인 점으로 볼 때, 본 유적의 도로가 왕경의 방리구획에 의해 연결되거나

전황복사지 사역 혹은 왕릉 조영과 관련하여 대형의 미완성 석재를 이동하기 위한 특수 목적으로 가설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향후 이러한 발굴조사 결과를 토대로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 및

신라왕경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왕릉석재들..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왕릉 축조과정과 능원제도 및

신라왕릉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되길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