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26> 명활산성, 천군리사지, 황둔사지

박태문 2018. 4. 5. 15:52





명활산성, 천군리사지, 황둔사지


답사일 : 2018년 4월 3일








명활산성

둘레 약 6,000m, 지정면적 960,000㎡. 사적 제47호.

정확한 축성연대는 알 수 없으나 405년(실성왕 4) 4월에 왜병이 명활성을 공격하였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보면

그 이전에 축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축성방식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


당시 신라는 북으로는 고구려, 동으로는 왜적의 침입을 자주 받았던 때이다.

또한, 실성왕은 즉위하던 해인 402년에 왜(倭)와 화평을 하여 내물왕의 아들 미사흔을 인질로 보내는 등 관계가 좋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왜인의 침략이 극심하였던 시기에 왜의 침범에 대비하기 위하여 쌓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431년(눌지왕 15)에는 왜인이 이 성을 포위하고 점령하려 하였는데,

이는 이 성이 수도인 금성(金城)을 방어하는 데 중요한 지역이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473년(자비왕 16) 7월에 이 산성을 개수하고 475년 정월에 이 성으로 옮겨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있는데,

475년 당시 고구려의 장수왕에 의하여 백제의 개로왕이 아차성에서 살해되고 그 아들 문주왕이 웅진(熊津)으로 천도한 것이라든지,

죽령과 동해안을 위협해 오던 고구려의 직접적인 압력 등을 종합해보면 자비왕이 명활산성으로 옮겨 거주하면서

고구려의 남진에 대비하였던 것임을 알 수 있다.


554년(진흥왕 15)에 다시 돌로 쌓았을 때의 둘레가 1,906보이며, 593년(진평왕 15)의 개축시는 3,000보였다고 한다.

지금 이 성은 대부분이 허물어져서 겨우 몇 군데에서 자연석으로 깨뜨려 아무런 가공 없이 쌓았던 옛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축조는 진평왕 때 개축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 산성은 남산성(南山城)·선도산성(仙桃山城)·북형산성(北兄山城) 등과 함께 동해로 쳐들어오는

왜구 등에 대하여 수도 경주를 방어하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축성방식 역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는 신라 초기의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보문호수가 아름답게 내려다 보인다.










너럭지대를 지나 천군동 사지에 오른다.










경주 천군동 사지

사적 제82호



절터는 경주 서라벌초등학교에서 동쪽으로 약 100m 떨어진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3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절의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석탑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보인다.


1938년에 일본인이 처음으로 발굴 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조사 이전부터 붕괴된 석탑과 주춧돌, 석재 등이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고 한다.

조사 결과 금당(金堂)터, 강당(講堂)터, 중문(中門)터 등이 확인되었다.

금당터에서는 일부 바닥돌과 함께 받침 부분의 규모만이 확인되었고, 강당터에서는 주춧돌이 발견되지는 않았지만

동·서·남쪽면에서 면석 안에 채워 다진 적심석(積心石)이 확인되어 기둥 간격을 알게 되었다.

중문터에서는 일부 주춧돌과 적심석 등이 발견되었지만 그 규모는 확인하기 어렵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 천군동 동·서 삼층석탑(慶州 千軍洞 東·西 三層石塔) 중, 동탑의 모습

1963년 1월 21일 대한민국보물 제168호로 지정



넓은 평지에 동·서로 서 있는 쌍탑으로, 무너져 있던 것을 1939년에 복원한 것이다.

두 탑 모두 2단의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세운 양식이며 규모와 수법이 같다. 


기단은 각 층마다 4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본떠 새겼는데, 가운데에는 2개씩의 조각을 두었다.

탑신의 각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밑면의 받침은 층마다 5단이며, 처마선은 반듯하게 깎았는데 네 귀퉁이에서 약간씩 들려 있다.

3층 몸돌에서는 1939년 발굴조사를 할 때 한 면이 24cm, 깊이가 15cm인 사리를 두는 공간이 발견되었다.

탑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서쪽 탑에만 일부만 남아 있을 뿐 동쪽 탑은 모두 없어 졌다.

아직 통일신라 석탑의 건실함을 잃지 않은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각 부의 비례가 알맞고 전체의 형태가 장중한 석탑이다.

(출처 : 문화재청)









서탑의 모습









현지 안내문을 옮기면,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의 3층 석탑으로 동서로 마주 보고 서 있다.

 절 이름은 알 수 없고, 이중 기단 위에 세워진 두 탑은 일반형에 속하며 양식이나 규모가 같다.

서탑은 탑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일부 남아 있고, 동탑은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없어졌다.

기단에는 면마다 네 개의 기둥새김이 있고,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돌로 이루어져 있다.

지붕돌 밑면의 층급 받침은 5단이며, 처마선은 반듯하게 깎았는데 네 귀퉁이는 약간씩 들려 있다.

아직 통일신라 석탑의 건실함을 잃지 않은 장중한 느낌을 주며 8세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안내문에서 처럼 서탑(전) 꼭대기의 머리장식이 일부 남아있는 것이 확인되며

동탑(후)은 머리장식이 없음을 볼 수 있다.







황둔사지 가기 전, 황룡사 입구의 특이한 석재들









황룡사(황둔사)









평화로워 보이는 모습이다.










황둔사지

 

동대봉산 자락에 있는 황룡동 절골의 황둔사(황룡사)터는 633년 신라 선덕여왕때

 

창건 되었다고 전해진다. 조선시대 인조대왕때 불국사의 담화스님이 임진왜란시

 

소실된 절을 창하였으나 이후 다시 불타 없어지고 지금은 폐탑과 초석만 남아있다.

 

절골에는 99암자가 있었으며 물이 좋고 산세가 뛰어나 많은 고승이 나왔다고 전해진다.

 

 








황용사지 동, 서 탑재가 복원되지 못한채 널부러져 있다.









 

황용사지 동,서 탑재 안내문









황용사지 고려탈재









고려시대 석탑으로 추정되는 탑재들을 모아두었다는 안내문이 있다.









신기한 석조물의 황룡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