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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답사 19> 오야리삼층석탑, 고인돌군, 왕룡사, 유연정, 운곡서원

박태문 2017. 11. 20. 13:27




오야리삼층석탑, 고인돌군, 왕룡사, 유연정, 운곡서원


답사일 : 2017년 11월 14일









 

경주 오야리 삼층석탑

(상북도문화재자료 제93호)

 

소광사 대웅전과 진영각 사이에 자연암석 위에 석탑이 세워져 있다.

 

 

 

 

 

 



경주 오야리 삼층석탑

 

이 탑은 경주에서 포항으로 향하는 경포산업도로의 동편 산중턱에 있으며,

옛 절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으나 현재는 소광사라는 작은 사찰 내에 위치하고 있다

 

벽돌탑을 모방한 3층의 석탑으로 높이는 약 2.5m이다.

거대한 자연 암반을 기단으로 삼아 윗면은 평평한 곳에 2개의 돌로 받침대를 놓고 몸돌을 올렸다.

 

1층 몸돌의 남쪽면에는 높이 37cm, 폭 31cm정도의 작은 불상을 안치하는 방인 감실을 만들었다.

한 개의 돌로 감실을 깊이 파내고 전면 위에는 상인방석(이맛돌)을 만든 특이한 경우이다

이 감실의 아래 받침돌의 윗면과 이맛돌의 아랫면에 각각 구멍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원래는 돌로 된 문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탑은 구성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안내문 전문)

 

 

 

 




 

석등안에 불상이...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삼층석탑의 모습을 가까이서 담아본다.

 

 

 


 

 

 


 

오야리 고인돌군

 

오야리 마을 뒷편, 완만한 경사지에 과수원..

과수원 사이사이 군데군데에 수십기의 고인돌이 떼지어 있다.

 

 

 

 


 




 

왕룡사 무량수전

 

 

 

 

 


 

무량수전 측면

 

 

 

 

 

 

 


 

경주 왕룡사 목조 문무인상

크기는 약 1.2m 정도로, 누구를 나타낸 것인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하다.

이곳에 전하는 이야기로는 경순왕과 태자 김충이라고 하나 절 측에서는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경주문화원에 전시된 사진에는 왕룡사 문무왕 목신상으로 적혀 있다고 한다.

 

 

 

 

 

 

 


 

문인상(사진 오른쪽)

상은 얼굴이 전체 길이의 거의 절반을 차지하며, 신장은 매우 짧다.

둘 다 오른손은 옷 속에 감추고 왼손만 밖으로 드러내어 놓았다.
문인상은 큰 관모를 쓰고 있으며, 왼손으로 턱수염을 잡고 있고 푸른색 옷에 얼굴은 살 색으로 칠해져 있다.

 

 

 

무인상(사진 왼쪽)

무인상은 투구를 쓰고 있으며, 투구 위에는 삼지창(三枝槍)이 꽂혀 있다.

왼손에 무엇을 받쳐 든 것 같은데, 지금은 없어졌고 푸른색 옷에 얼굴은 붉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유연정

 

유연정은 저물어가는 가을에 딱 어울리는 곳이다.

 

 

 

 

 

 

 

 


 

경주 유연정


998년 4월 13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45호로 지정되었다.

권운곡이 소유하고 있다. 운곡서원(雲谷書院)에서 계곡 쪽으로 50m 정도 떨어진 용추대(龍湫臺) 위에 세워진 정자이다.
1811년(순조 11) 안동권씨 시조인 고려 태사(太師) 권행(權幸)과 그의 후손 권산해(權山海),

권덕린(權德麟)을 추모하기 위하여 후손들이 창건하였다.

 

정면 3칸, 측면 2의 홑처마 팔작지붕집으로, 좌측칸을 통칸의 우물마루로 꾸몄다. 마루 전칸면에는 헌함(軒檻:대청
기둥 밖으로 돌아가며 깐 난간이 있는 좁은 마루)을 두었고 대청에는 골판문을 달았으며 얕은 자연석 주초 위에 두리기둥을 세웠다.

특이하게, 대청의 대들보 위에는 우물반자를 설치하고 반자 양측에 각재를 내린 후 반원형의 판재를 45도로 끼웠다.

용추계곡, 압각수(鴨脚樹:은행나무) 등 주변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1800년대 초기의 건축수법을 잘 나타낸다.

(출처: 문화재청)

 

 

 

 

 


 



 

유연정

 

유연정은 운곡서원의 부속건물로 서원에서 동쪽으로 50m쯤 떨어져 있다.

 

 

 

 

 

 

 

 


 

운곡서원

 

가을이면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서원과 정자는 울긋불긋 단풍 물결에 파묻혀 장관을 이룬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경덕사(景德祠), 신문(神門), 5칸의 중정당(中正堂), 각 1칸의 동무(東廡 )와 서무(西廡),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외삼문(外三門), 6칸의 유연정(悠然亭), 주소(㕏所) 등이 있다.

 

 

 

 


 

 

 

담장 너머 운곡서원 

 

 

 

 

 

 

 

 

 

고즈넉한 서원의 분위기가 만추를 즐기기에 딱 좋았다.

 

 

 

 

 

 

 


 

서원으로 향하는 정문인 외삼문


1784년(정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행(權幸)의 공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이 지역에 추원사(追遠祠)를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권산해(權山海)와 권덕린(權德麟)을 추가배향하였으며, 운곡서원으로 개편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30년 유허지(遺墟址)에 설단(設壇)하여
향사를 지내왔으며, 1976년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연정 앞 350수령의 은행나무 '압각수'

 

'압각수'라는 이름은 나뭇잎이 오리발을 닮았고 가지가 오리 다리와 비슷하게 생겨서

그러한 이름이 붙게 되었다고 한다.

가을이면 낙엽비를 즐기려 수많은 관광객들로 북적댄다.

 

 

압각수의 유래

 

압각수(은행나무)는 정조13년 기유(己酉)1789년 죽림공(竹林公)
복작시(復爵時) 공의 12세손 갈산공(葛山公)이 죽림선조 복작교지(復爵敎旨)를 봉수하여 오는 길에

금성단(錦城壇)옆에 있는 압각수 가지를 꺾어 와서 심은 나무이며 경주시 보호수 11-15-16호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이 나무의 모수인 영주 순흥 금성단 압각수는 단종손위(端宗遜位)를 미리알고 죽었다가
사육신이 신원될 때 소생하였다고 하여 수목도 육신의 혼령이 깃든 영이(靈異)한 나무로 전하며
갈산공이 그 해 5월15일 가지를 꺾어 영주에서 예천의 죽림공 묘소를 거쳐 사백여리를 걸어
한 달 만인 6월16일 운곡에 도착하니 가지가 말라서 살 수 없는 지경이나
"우리선조 죽림공의 충절이 다시 빛나듯이 이 나무도 반드시 살아 날것"이라며

심었더니 과연 기적적으로 살아났다고 한다.
2년 후 진사 윤기(尹愭)가 성균관에서 압각수 기문을 지어 보낸 것이
죽림실기(竹林實記)에 실려 전하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