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7>희강왕릉, 민애왕릉, 안심리 암각화

박태문 2017. 11. 20. 10:57





희강왕릉, 민애왕릉, 안심리 암각화

  

답사일 : 2017년 11월 7일










희강왕릉 (사적 제220호)


경북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에 있는 신라 제43대 희강왕의 능.

희강왕은 836년에 왕이 되어 2년간 재위하였으며, 죽은 뒤 소산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추측하고 있다.

          

사적 제220호. 면적 9,488㎡. 무덤지름 14m, 높이 3.4m. 희강왕은 836년에 왕이 되어 2년간 재위하였으며,

죽은 뒤 소산(蘇山)에 장사하였다는 기록에 따라 이곳으로 비정하고 있다.

무덤은 낮은 구릉의 중복에 있으며, 외부 모습은 높이에 비하여 밑면이 넓은 둥근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일반적인 민묘와 동일하며 아무런 특징도 보이지 않는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희강왕 묘비











전 민애왕릉


사적 제190호. 지정면적 11,283㎡. 무덤의 지름 12.5m, 높이 3.8m, 면적 1,130㎡.  
무덤은 경사진 지형을 이용해 외양을 흙으로 덮은 둥근 봉토분[圓形封土墳]이다


이 능은 광복 전에 두 차례 도굴당했고 1981년에도 도굴당할 뻔했으나 주민들이 사전에 알아 미수에 그친 적이 있다.
이러한 일때문에 능의 정비가 필요하게 되어 1984년 9월국립경주박물관에서 봉분의 주변을
발굴 조사해 완전한 규모를 밝히게 되었고, 아울러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무덤의 밑 둘레를 따라 너비 30㎝, 길이 10∼100㎝의 잘 다듬은 장대석(長臺石)을 3단으로 쌓아올린
다음, 그 위에 길이 80㎝, 높이 15㎝ 내외의 장방형 갑석(甲石)을 올려 보호석렬(保護石列)을 마련하였다.


여기에 너비 35㎝, 길이 100∼130㎝의 단면 5각형의 받침석[支柱石] 20여 개가 무덤 둘레를 따라
190∼290㎝ 간격으로 받쳐져 있었다. 또한 봉분 밑 둘레 외곽으로 12개의 구멍이 일정한 간격으로 마련되어 있었다.

 


깊이 18㎝, 지름 25㎝ 크기의 구멍에는 곱돌[蠟石]로 만든 십이지상(十二支像)을 넣은 것이
확인되었는데  쥐, 돼지, 소, 닭 4개만 발견되었다. 다른 십이지상은 무덤의 외부 받침석이 마련될 때 파손되어 없어진 것 같다.

이 십이지상은 높이 10㎝ 내외의 작은 것으로 무덤의 바깥쪽을 보게 서있었다.


또한 주변에서 뼈단지[骨壺]가 발견되었다. 뚜껑에는 ‘元和十年(원화십년)’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원화는 중국 당나라 때의 연호로 원화 십년은 815년에 해당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 민애왕 묘비


이 능은 70여 개의 받침석이 후대에 와서 보완되었고, 또 주변에서 815년에
만들어진 뼈단지가 발견됨으로써 무덤의 주인공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이 능은 815년 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에 839년에 죽은 민애왕과는 시기가 맞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 제44대 민애왕(838∼839)의 무덤 전경











경주 안심리 암각화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312호)

경주안심리암각화는 광석마을의 남쪽 논 가운데 있는 3기의 분묘 옆에 위치한다.

이 암각화는 1995년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의 조사에 의해 알려지게 되었다.

 암각화는 비정형의 고인돌처럼 느껴지는 바위에 검파형(劍把形) 그림 23개와 성혈 7개, 드무형 성혈 1개 등

총 31개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암각화는 땅위에 돌출된 높이 2m 정도의 바위에 그림을 새긴 것이다.

검파형 그림은 동쪽면에 18개가 집중되어 있으며, 서쪽면에 1개, 윗면에 4개가 새겨져 있다.

동쪽면에 새겨진 검파형 그림 중 9개는 형상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미완성의 그림으로 파악된다.

그림의 규모는 비교적 작은편으로 큰 것이 11×10.6×8.5×14.8㎝, 작은 것이 8×9×6.4×10㎝ 정도이며
각 선의 굵기는 1㎝ 정도이다. 가로줄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있는데, 방패모양의 내부에는 4~5개의 성혈이 있다.
검파형그림은 경주 석장동 암각화에 새겨진 것보다 단순하고, 포항 칠포리 암각화에 새겨진 것보다 크기가 작은 편이다

 

제작방법은 쪼은 것과 쪼은 후에 약간 갈아 판 흔적이 보이며, 쪼은 흔적이나 각선(刻線)이 예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금속도구를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바 청동기시대 혹은 초기철기시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새김방식은 동해안과 형산강, 낙동강유역의 강변이나 계곡에 분포하는 암각화와 유사한 방법이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주안심리암각화에 새겨진 그림들은 선사인들이 농사의 풍요와 생산을 기원하는 주술행위로

비나 물 관련의 기우제(祈雨祭)에 따른 참여자의 의식절차를 그려놓은 것으로 풀이된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