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14> 무열왕릉, 김인문묘, 김양묘, 장산고분
무열왕릉, 김인문묘, 김양묘, 장산고분
답사일 : 2017년 11월 24일
태종무열왕릉비
높이 2.1m. 국보 제25호.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릉의 비로서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을 뿐 비신은 소실되었다. 『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의하면 이 비는 무열왕이 승하한 661년에 건립되었으며,
비문(碑文)은 김인문(金仁問)이 썼다고 하나 정확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비의 아래에는 귀부를 놓고 위에는 이수를 얹은 형식은 중국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 비의 조각수법은 독창적이다.
귀부의 머리는 거북모양으로 목은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고 있어 전체는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
과감한 기상을 보여주면서도 표정은 과격하지 않고 오히려 명랑하다. 비좌(碑座)는 연꽃으로 이루어져 있고
귀갑은 4중의 육각형 귀갑문이 조각적인 수법으로 새겨져 있다.
이수는 좌우 3마리씩 놓여 있는 용이 서로 상대방의 앞발을 꼬리로 꼬아 전체는 좌우대칭형을 이루고 있는데,
다리의 표현, 용의 비늘 하나 하나가 생동감 있게 조각되어 있다.
귀부와 이수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은 각자 생기가 있으면서도 전체와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짜임새를 보여준다.
귀부의 머리나 귀갑의 외형, 이수 등 그들의 윤곽은 완만한 곡선으로 단순화된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탄력성 있는 양감(量感)을 지니고 있어서 당시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충만한 조각성과 공통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통일신라 초기의 조각들이 보여주는 이상화된 사실주의 양식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신라 말기가 되면 귀부·비신·이수 셋으로 이루어지는 전체 형식은 변하지 않으나,
귀부와 이수, 각각의 조각양식은 격동적이고 율동적인 모습으로 변천한다.
말기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郎禪師塔碑, 보물 제360호)를 들 수 있다.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태종무열왕릉비
경주 태종무열왕릉
사적 제20호
경주 무열왕릉은 신라 제29대 태종(太宗) 무열왕(재위 654∼661, 김춘추)의 능이다.
경주 북서쪽에 있는 선도산(仙桃山)에서 남쪽으로 뻗은 구릉의 말단부에 위치해 있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中代)의 첫 진골(眞骨)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 대업의 기반을 닦았으나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능은 밑둘레 114m, 높이 8.7m로 비교적 큰 편이며 능 아래쪽은 자연석을 쌓고 드문드문 큰 돌로 받쳤으나 지금은 흙 속에 묻혀 있다.
동쪽에 비석을 세웠던 돌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라는 글씨가 돋을새김되어 있어 이 곳이 무열왕의 능임을 알 수 있다.
(출처: 문화재청)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
위에서 언급되었지만,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金仁問)이 쓴 것이다.
능의 곡선과 소나무의 어우러짐이, 아름답다.
배롱나무인지,, 초록과 어우러져 예쁘다..
경주 서악동 고분군
사적 제142호
서악동 고분군 비석이 덩그란히..
경주 서악동 고분군은 무열왕릉 바로 뒷편의 구릉에 분포하는 4개의 대형 무덤을 가리킨다.
이곳의 무덤들은 경주분지의 대형 무덤과 비슷한 형태로 둥글게 흙을 쌓아올린 원형 봉토무덤이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내부구조 시설은 확실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봉분이 거대한 점, 자연돌을 이용해 둘레돌을 두른 점 및 무열왕릉보다 높은 곳에 있는 점으로 보아
안에는 나무로 된 네모난 방을 만들고 그 위와 주변에 돌무더기를 쌓은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 형식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들 무덤이 분포한 지형은 선도산에서 서남으로 뻗은 능선상에 있고,
뒷산과 동서의 계곡 건너에 있는 능선 등을 종합해 볼 때, 풍수지리사상의 영향하에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주인에 대해 첫 번째 무덤은 법흥왕릉, 두 번째 무덤은 진흥왕릉, 세 번째 무덤은 진지왕릉,
네 번째 무덤은 문흥대왕릉 등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출처: 문화재청)
4개의 무덤을 가까이서 모두 담아본다.
김양의 묘비석
서악동에 있는 무열왕릉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김인문 묘(경북 기념물 32호)와 나란히 있다.
김양의 묘
(경북 기념물 제33호)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신라의 왕족 김양(808∼857)의 묘.
태종 무열왕의 9대손으로 흥덕왕 3년(828)에 고성 태수가 되었고 무주 도독을 지냈다.
가는 곳마다 많은 공적을 남겨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830년에 장보고와 함께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신무왕)을 왕으로 추대하여 모셨으며 신무왕이 일찍 죽자 뒤를 이은 문성왕을 다시 모셨다.
문성왕 19년(857)에 나이 50세로 죽자 그에게 대각간의 벼슬을 내리고 태종 무열왕의 릉(陵) 서열에 따라 그 곳에 같이 모셨다.
특별한 시설 없는 비교적 큰 무덤이며 흙으로 높게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출처: 문화재청)
김인문 묘
경주시 서악동에 있는 문무대왕의 친동생 김인문(629∼694)의 묘.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책을 많이 읽었고 특히 글씨를 잘써 태종 무열왕의 비문을 썼고 활쏘기와 말타기에도 능하였다.
또한 넓은 식견과 훌륭한 재주와 솜씨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20대에 당나라에 들어가 좌령군위장군이 되었고 신라에 들어와서는 군주가 되어 장산성을 쌓는데 감독을 맡았다.
외교술에 능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킬 때 당나라에게 신라측 협조사항을 받아내는데 큰 공을 세워 신라의 삼국통일에 큰 역할을 하였다.
당나라에서 관직을 지내다가 효소왕 3년(694)에 죽었다. 당 고종은 그의 시신을 호송하여 신라로 보냈으며
효소왕은 그에게 태대각간(太大角干)의 벼슬을 내렸고 서악에서 장례를 치르게 했다.
특별한 시설이 없이 높이 6.5m의 흙으로 높이 쌓아 올린 원형봉토분이다.
(출처: 문화재청)
서악동 귀부
(보물 제70호)
서악동 귀부는 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있는 높이 1.04m의 조형물로 비석을 세웠던 받침돌이다.
본 귀부는 김인문의 공적을 새겼던 비의 일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발견된 비석 조각에 새겨진 글과 삼국사기「열전」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고 한다'
비석 귀부는 전체적으로 태종무열왕릉 비석의 귀부와 비슷한 형태로 만들었는데,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양식이라고 한다.
서악리 무열왕릉의 남쪽 길 건너편에 남아있는 것으로,『삼국사기』의 기록이나 서악서원의 영귀루 북쪽 받침에서 찾아낸
비석조각에 새겨진 글로 미루어, 김인문(629∼694)의 공적을 새겨놓았던 비의 받침돌인 것으로 짐작된다.
네 발로 힘있게 디디고 있는 받침돌의 거북은 목을 앞으로 길게 빼고 있다.
앞뒷발의 발가락이 모두 5개인 것이 다를 뿐 기교면에서 태종무열왕비의 귀부와 쌍벽을 이루고 있으며,
목에 새겨진 다섯가닥의 목주름은 사실적이면서도 자연스럽다.
거북의 등에 새긴 큼직한 육각무늬 역시 조각솜씨가 뛰어나며, 등 주위에 새긴 구름무늬와
그 바깥쪽에 구슬을 꿰놓은 듯한 무늬를 돌린 것은 독특한 모습이다.
등중앙에는 비를 꽂아 두었던 네모난 홈이 마련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거북받침돌의 양식적인 변천을 볼 때, 9세기 부터는 거북의 머리가 용의 머리로 바뀌게 되는데,
서악리 귀부는 거북머리의 원형을 잘 지니고 있어, 한국 석비 받침돌의 최초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만들어진 연대는 삼국통일 후인 7세기 중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출처: 문화재청)
귀부 뒤로 보이는 무덤이 김인문의 묘이다.
경주 장산 토우총
고분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장산에서 토우가 출토되어 '장산 토우총'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
통일신라시대의 석실분으로 추정되는데 이미 중요한 유물들은 도굴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 이유에서인지 개방하지 않고 있어 내부는 볼 수 없었다.
발굴한 토우들은 경주박물관에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