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0> 화백정, 동남산과 비파골

박태문 2017. 10. 20. 09:46




화백정, 동남산과 비파골

(화백정, 보리사, 일천바위, 금오정, 상사바위, 금오봉, 비파골)


답사일 : 2017년 9월 30일








도당산의 '화백정'


화백정은 남산 가는길의 휴식처이자 경주시내가 한 눈에 보이는 전망대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도당산은 신라시대 6부 대표들이 나라의 중대사를 의논하던 화백회의를 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해서 도당산 정상에 육각정자를 만들어 '화백정'이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화백정에서 보리사로 오르는 길에는 어느것 하나 그냥 지나치지 못할 만큼

바위에 그려진 그림을 관찰하는 재미도 있다.









무엇에 쓰였던 것인지 가로로 점선모양으로 홈이 파여 있는 바위










좀 규모가 있다 싶으면 이렇게 바위마다 벽화가 있다.











보리사 가는 길









보리사


경주 남산자락에 위치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화랑교를 넘어 탑골 입구에서 약 400m 남으로 가면 옛날 나룻배가 닿던 갯마을이 있다.

지금은 임업시험장이 있고 이 뒤쪽 계곡이 미륵골이다.

산 능성이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보리사가 나온다.










보리사 전경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뒷편의 구렁이(?) 머리처럼 생긴 특이한 바위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전체 높이 4.36m, 불상 높이 2.44m의 대작으로 현재 경주 남산에 있는 석불 가운데 가장 완전하며

광배와 대좌를 모두 구비한 이 불상은 머리의 육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면서 은은한 미소가 감싸고 있다.

목 이상은 다른 돌로서 끼워진 것이라 하며 얼굴에 비해 몸은 약간 빈약한 편으로

손이나 팔은 연약하게 표현되었으며 하체는 다소 경직 되게 처리되었다.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은 옛 신라시대 보리사가 위치했던 곳으로

현재에도 보리사가 그 법맥을 이어가고 있다.


보물 제136호로 지정이 되어 있는데
인자한 미소로 유명하며 현재 경주남산에서 가장 완전한 형태로 남아 있는 석불이기도 하다.

 

대좌는 상·중·하대로 구성하였는데, 상대는 16엽의 복판(겹꽃잎) 연화문이며 중대는 8각으로 안정감이 있고

하대도 연화문이다. 광배는 주형(舟形) 거신광으로 윗 부분이 절단되었으나 지금은 붙여 놓았으며

굵다란 선으로 두광·신광을 마련하였는데, 선을 따라 12엽의 화문이 있다. 선 안에는 보상·당초문이 화려하게 조각되었고,

그 사이의 두광에는 세 化佛이, 신광에는 네 化佛이 배치되었으며, 바깥쪽으로 화염문이 유려하게 올라가고 있다.



 

 


 



보리사 삼층석탑


이 탑은 경내에 무너진채 흩어져 있던 석탑재들을 수습하여 1993년 복원하였다고 한다.











보리사 마애석불


보리사 마애석불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3호)

보리사 주차장에서 약 150m 정도 높이는 30m 정도 산길을 치고 올라가면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마애석불이 나타난다.

산중턱의 바위를 약간 파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하였다.

산비탈에 새겨진 마애불들은 대부분 비스듬하게 조각되어 있다.

경사면이어서 불자들이 아래쪽에서 위쪽으로 치성을 올리는데 이를 배려한 각도라고 한다.










일천바위


옛날 동남산 부근에 한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며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 평화를 시기한 마군들이 쳐들어왔다. 백성들은 마을 산꼭대기 바위에 올라가 한울에 도움을 간청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들판은 온통 물바다를 이루어 산봉우리 바위만 겨우 남기고 모두 물에 잠겼다. 

마군들은 계속 되는 홍수에 모두 떠내려가고 바위 위에 올라온 1천여 백성만 살아남았다. 

백성들은 홍수가 휩쓸고 간 벌판에 다시 마을을 세워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천 바위라 불렀다는 전설이다.


일천 바위는 높이가 10m로 동남산 허리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 이 곳에 서면 시야가 확 트인다. 











마왕바위


바위틈에 끼여있는 모습인데 홍수에 떠내려가던 마왕의 머리라고 전해온다










'상사바위' 일부가 보인다.


상사바위에 얽힌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국사골 어귀에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시고 외롭게 홀로 사는 할아버지가 계셨다.

할아버지는 동네 이이들을 사랑했으며 이이들도 할아버지를 좋아했으며 그 중에서도 피리 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했다.

소녀도 외로운 할아버지를 불쌍하게 생각하고 과일이랑 맛있는 음식도 갖다 드리고 때로는 말벗이 되어 주었다.

어느 듯 피리 도 꽃다운 처녀가 되어 다른 마을로 이사를 가게 되면서 할아버지는 홀로 남게 되었다.

소녀가 떠난 후 할아버지는 피리 소녀를 잊지 못했고 눈을 뜨면 산마루에 눈을 감으면 눈 속에 피리 가 웃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한 남자로써 피리소녀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생각하며 자신을 원망하다가 사랑의 아픔을 견디지 못하고 나무에 목을 매고 돌아 가시고 말았다.

죽은 할아버지는 큰바위가 되어 정상으로 우뚝 솟아올랐다.

그 날 이후로 피리 소녀는 밤마다 큰 뱀이 되어 자기에게 다가오는 할아버지 꿈을 꾸었다.


어느 날 밤 꿈속에 할아버지가 나타나

"아무리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어 죽음을 택했는데

죽어서도 잊지 못하고 피리 아가씨를 이렇게 괴롭히니 나를 용서 하려무나

살았을 땐 죽을 길이라도 있었는데 이제 죽었으니 더 죽을 길도 없구나. 제발 나를 용서해 다오"


피리 소녀는 자기를 그리워하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너무 불쌍한 생각이 들어 할아버지바위에 올라가

"할아버지 인간세상에서 나이 때문에 소원을 못 이루었으니 천년세월 지나도 나이를 아니 먹는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의 소원을 풀러드리겠습니다."

라고 말한 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고 말았다.

 그러자 할아버지 바위 옆에 또 하나의 바위가 솟아올라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 라 부른다.

지금도 큰 바위 아래에 붉은 반점이 피리 의 핏자국이라 전하는 전설이 깃던 바위다.









촛대처럼 우뚝 솟아있는 특이한 괴암












어느 부분의 초석이었을..






금오봉 인근,  '비파골의 전설'과 '남산과 망산의 유래' 안내판이 있어 옮겨 본다.


비파골(蜚琶谷)의 전설

 

이 계곡에는 네 곳의 절터가 있고 4기의 석탑지가 남아 있는데, 그 모양이 특이할 뿐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오는 재미있는 전설이 숨어 있는 뜻 깊은 골짜기이다.

 

신라 32대 효소왕 6년(697년) 동쪽 교외에 망덕사라는 절을 세우고 낙성식을 올리게 되었는데 임금님이 친히 행차하여 공양을 올렸다.

그 때 차림이 누추하고 못생긴 스님이 와서 임금님께 청하기를 "저도 재에 참석하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임금님은 마음이 언짢았지만 맨끝에 앉아 참석하라고 허락하였다.

 

재를 마치고 임금님은 스님을 불러 조롱하는 투로 말을 하였다. "비구는 어디에 사는가 ?" "예 저는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라고 대답하자 임금님은 "돌아가거든 임금이 친히 불공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시며

스님을 비웃듯이 바라보자, 스님은 웃으면서 "예, 잘 알겠습니다. 임금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다른 사람에게 말씀하지 마십시오"하고 말을 마치자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임금님은 깜짝 놀라 자신을 부끄러워하며 스님을 부르며 허겁지겁 산에 올라가 그가 날아간 하늘을 향해 수없이 절을 하였고,

스님이 사라져 버리자 신하들을 보내 진신석가를 찾아 모셔 오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비파골 안 삼성곡이라는 곳에 이르러 지팡이와

바리때가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발견하였으나, 진신석가 부처는 바리때와 지팡이만 남겨 두고 바위 속으로 숨어버린 뒤였다.

 

신하들은 돌아와서 그 사실을 말씀드렸고, 효소왕은 자신을 뉘우치고 비파암 아래 석가사를 세웠고,

진신석가가 숨어버린 바위 위에는 불무사(佛無寺)를 지어 바리때와 지팡이를 두 절에 나뉘어 모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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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南山)과 망산(望山)의 유래

 

옛날 경주의 이름은 서라벌(徐羅伐) 또는 새벌이라 했으며, 새별은 동이 터서 솟아오른 햇님이 가장 먼저 비춰주는 광명에 찬

땅이라는 뜻으로 아침 햇님이 새벌을 비추고 따스한 햇살에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변화가 아름답고 온갖 곡식과 열매가

풍성하여 언제나 복된 웃슴으로 가득 판 평화로운 땅이었다.

 

이 평화로운 땅에 어느날 두 신이 찾아 왔다. 한 신은 검붉은 얼굴에 강한 근육이 울퉁불퉁한 남신이었고,

또 한 사람은 갸름한 얼굴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동자, 예쁜 웃슴이 아름다운 여신이었다.

 

두 신은 아름다운 새벌을 둘러보고 "아 ! 우리가 살 땅은 이곳이구나!"

하고 외쳤고, 이 소리는 너무나 우렁차서 새벌의 들판을

진동하였다. 이 때 개울가에서 빨래하던 처녀가 놀라 소리나는 곳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산 같이 큰 두 남녀가 자기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아닌가 ? 처녀는 겁에 질려 "산 봐라 !" 하고 소리 지르고는 정신을 잃었다.

"산 같이 큰 사람 봐라 !"라고 해야할 말을 급한 나머지 "산 봐라 !"하고 외쳤던 것이다. 갑자기 발 아래에서 들려오는

외마디 소리에 두 신도 깜짝 놀라 그 자리에 발을 멈췄는데 그만 왠일인지 다시는 발을 옮길 수 없었고,

두 신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일 수 없는 산이 되었는데, 소원대로 이곳 아름답고 기름진 새벌에서 영원히 살게 된 것이다.

 

남신은 기암괴석이 울퉁불퉁하고 강하게 생긴 남산(南山)이 되었고,

여신은 남산 서쪽에 솟아있는 부드럽고 포근한 망산(望山)이 되었다고 전해져 온다    


< 참고문헌 : 경주사지 >









경주남산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


잠늠곡삼층석탑이라고도 한다.

비파곡은 계곡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이계곡의 이름이 붙여진 비파암이 있고

옆으로 석가사지와 그리고 그 위로 불무사지가 위치해 있기도 합니다.

탑의 크기는 2.91m 그리고 현재 잠늠곡삼층석탑은 2층과 3층의 몸돌과
몸돌받침은 비슷한 재질의 부재로 보충하여 복원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남산의 다른 석탑에 비해 산중에 위치한 삼층석탑중에는

비교적 접근이 용이한 곳에 위치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