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문화재 답사 11> 진평왕릉, 설총묘, 보문동 당간지주, 보문리 사지

박태문 2017. 10. 13. 12:31



진평왕릉, 설총묘, 보문동 당간지주, 보문리 사지


답사일 : 2017년 10월 10일







신라 진평왕릉

 

진평왕(579-632년)은  53년간 왕위에 있었으므로, 시조 박혁거세 이후 신라에서 가장 오래 왕위에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 좀 더 크고 제단도 화려했을 법도 한데 진평왕릉은 참으로 소박하다.

하지만 왕의 위엄은 가릴 수 없는지 잘 정돈된 듯한 모습의 왕릉과  주변의 모습들이 왠지 위엄있게 다가온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전하고 있다


이 능은 신라 제26대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김백정)이 모셔진 곳이다.

  봉분의 높이 7.6m, 지름 38m로 둥글게 흙을 쌓은 원형 봉토분으로,

무덤 밑둘레에 자연석을 이용해 둘레돌을 둘렀으나, 현재는 몇 개만 드러나 있다.

  이 능은 아무런 시설 없이 평야 가운데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진평왕은 남산성(南山城)을 쌓았고, 명활산성(明活山城)을 개축하는 등 경주 방위를 중요시하였다.

  왕으로 있는 동안 고구려, 백제와 싸움이 빈번했으며,

중국의 수(隋)나라, 진(陳)나라, 당(唐)나라와의 외교에 힘써

후일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진평왕릉 일대에 고목들이 멋지게 자리하고 있다.









나무 사이로 담아본다.









경주 전 홍유후 설총묘

(경상북도 기념물 제130호)


신라 경덕왕 때의 학자인 설총의 묘. 아버지는 원효, 어머니는 요석공주이며 출생시기는 태종무열왕대인 654∼660년 사이로 알려져 있다. 

나면서부터 재주가 많았고, 경사에 널리 능통하였다고 한다.

신라 유학의 종주가 되었으며, 강수·최치원과 함께 신라의 3대 문장가로 꼽혔다. 이두를 창제했다고도 하나,

그가 생존하기 전인 진평왕 때의『서동요』, 선덕여왕 때의『풍요』등이 이두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그가 창제한 것이 아니라 집대성한 것으로 보인다.

설총은 6경을 읽고 새기는 방법을 발명하여 한문을 국어화하였으며, 유학 등 한학의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도 공헌하였다.

또 신문왕 때의 국학 설립에 주동적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분은 육두품 이며, 관직은 한림()에 이르렀다. 설총은 경사()에 박학하였고,

이두()의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화왕계()」를 지었다.

뒷날 그의 학문적 업적이 인정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에 홍유후()라는 시호를 추증 받았고

문묘()에 최치원()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조선 중기인 1623년(광해군 원년)에 경주서악서원(西)에 제향되었다. 

증보문헌비고()』에는 설총을 경주 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경주 및 순창()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경주 보문사지 연화문 당간지주(慶州 普門寺址 蓮華文 幢竿支柱)

(보물 제910호)


기도나 법회 등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사찰의 입구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성덕을 표시하는 기를 당(幢)이라 하며,

이를 달아매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고, 이 장대를 양옆에서 지탱하는 두 돌기둥을 당간지주라 한다.

이 당간지주의 동남쪽에는 보문사의 옛터가 남아있기는 하지만, 당간지주가 속한 절이 원래 보문사였는지,

아니면 별개의 사원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현재 이 당간지주는 넓은 논 한가운데에 62cm의 간격을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아래부분이 대부분 땅속에 파묻혀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밑의 구조는 확인하기가 어렵다.

양쪽 지주의 전체적인 모양은 가운데부분이 두드러진 형태이며, 꼭대기 안쪽에는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너비 13cm의 큼지막한 구멍을 두었다.

특히 지주의 윗쪽 바깥면에 네모난 틀을 두고, 그 안에 8장의 연꽃잎을 돌려 새겨 놓았는데, 이처럼 당간지주에 연꽃잎을 장식하는 것은 드문 경우이다.

통일신라시대인 8세기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되며, 이 시기에 제작된 것 중에서도 특이한 형태를 보이고 있어 주목되는 작품이다.










경주 보문사지 석조(慶州 普門寺址 石槽)

(보물 제64호)


보문사터로 알려진 곳에 남아 있는 석조이다. ‘보문(普門)’이라는 이름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발견되면서 보문사터로 알려진 이 곳에는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터와 쌍탑이 있었던 흔적이 있고, 당간지주, 석등받침돌 등이 함께 남아 있다.

이 석조는 절에서 생활에 필요한 물을 받아 두기 위해 만든 돌물통으로, 지금도 절에서는 이와 비슷한 것이 급수용기로 사용되고 있다.

큰 돌 하나로 내부를 파내어 물을 담도록 하였는데, 윗부분의 가장자리보다 밑부분이 약간 좁아졌고, 아래면은 평평하게 만들었다.

전체적으로 형태가 크지만 안팎으로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이 구조는 주변 유물들과 관련지어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보문사지 당간지주


지주의 양 기둥이 62cm 정도의 간격을 두고 마주 보고 있으며, 양쪽 기둥 가운데 북쪽 기둥은 윗부분의 일부가 떨어져 나갔고,

남쪽만 완전한 상태로 남아있다. 당간을 고정하기 위해 마련한 구멍은 위·중간·아래 3곳에 있는데,

 남쪽 기둥은 구멍이 완전히 뚫렸고, 북쪽 기둥은 반쯤 뚫려 있어 특이하다











지주의 구멍사이로 가을을 들여다 본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전체적인 형태가 가늘고 긴 모습이나 안정감이 있다.

다른 당간지주에 비해 비교적 작은 규모로, 매우 소박한 모습이라고 한다.








보문사지 석조와 가을 들녘










경주 보문리 사지(慶州 普門里 寺址)
(사적 제390호)

  이 절의 처음 건립연대는 알 수 없으나, 보문(普門)이라고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절 이름이 보문사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석제 유물이나 건물의 배치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절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금당지·동서 목탑지 등의 건물터와 석조·당간지주·초석·석등부재 등이 남아 있지만, 절터의 대부분은 넓은 논으로 경작되고 있다.


  금당지의 높이는 경작지의 표토에서 1m 정도이며, 흙으로 쌓은 축대 위에 건물의 기단석과 초석이 배치되어 있다.

목탑지는 금당지 앞의 높은 단 위에 남아 있는데, 서탑지의 중앙에 남아 있는 대형 초석에는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보문리 사지 서쪽에는 보물 제123호 보문리 당간지주가 있고, 북쪽으로 62m 지점에는 보문리 연화문 당간지주,

보물 제910호로 지정된 석조를 비롯하여 석등의 지붕돌 및 장대석 등 석조물이 남아 있다.








보문리 사지 초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