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8> 남산의 북쪽 능선
남산의 북쪽 능선
(상서장, 절터골, 전삼화령, 남산신성, 해목령, 금오정, 늠비봉, 부흥사, 부엉골, 윤을골)
답사일 : 2017년 9월 16일
상서장 추모문
경상북도 기념물 제46호. 외삼문을 들어서니 추모문이 나타난다.
상서장은 신라 말엽의 뛰어난 문필가 최치원이 머무르면서 임금에게 글을 올리고, 공부하던 곳이다.
최치원은 통일신라 후기의 학자로, 12세 되던 경문왕 8년(868)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18세에 과거급제 한후 벼슬길에 올랐다.
헌강왕 11년(885)에 귀국하여 진성여왕에게
사양길에 접어든 신라의 국운을 쇄신하는 경륜을 담은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바쳤으나 채택되지 않았다.
상서장이라는 이름은 이 집에서 왕에게 상서를 올렸다는 데서 유래했다.
또한, 왕건(王建)이 개국할 것을 짐작하고 상서하기를 '계림황엽곡령청송(鷄林黃葉鵠嶺靑松)'이라 하였다.
신라가 망하고 송도(松都)가 흥한다는 이 글을 보고 왕은 크게 노하였고,
최치원은 이후 해인사와 경주 남산 등에 숨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영정각 3칸, 상서장 5칸, 추모문 3칸, 수호실 3칸으로 구성된 와가 3동으로 되어있다.
한옥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상서장은 경주 남산 왕정골 남쪽에 있으며 1984년 5월 21일 경상북도기념물 제46호로 지정되어
최치원유적보존회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다.
정면 5칸으로 수수한 상서장 건물
상서장 영정각
고운 최치원 선생의 영정이 있는 곳이다.
외삼문, 추모문과 일직선상에 자리하고 있다.
문창후최선생상서장비
추모문의 왼쪽에는 조선고종11년(1874년) 에 건립한 비각이 있다.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쫓는 탐방객들
내부에는 최치원 선생의 일대기와 주요연혁들이 소개되어 있다.
고운 최치원에 대해서 알자보자면...
최치원은 경주 최씨의 시조로 신라의 학자이자 문장가이다. 신라 말 ‘세 사람의 최씨’ 가운데 한 사람으로 불릴 정도로 문장을 인정받았다.
특히 879년 황소(黃巢)의 난 때 고변(高騈)의 종사관으로서 〈토황소격문〉의 기초를 작성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
최치원의 집안은 귀족 출신은 아니었다. 오히려 6두품으로 신라에서는 출세에 한계가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신라를 대표하는 학자를 많이 배출한 가문이었다.
아버지 최견일에 대해서 자세하게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원성왕의 원찰인 숭복사(崇福寺)의 창건에 관계하였다고 전해진다.
최치원은 열두 살이던 868년(경문왕 8) 당나라로 유학을 갔다
당시 당나라는 친당파를 키워 당의 문물을 전파하기 위해 주변국에 문호를 개방하고 외국인에게도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게 했다.
최치원도 일종의 국비유학생으로 뽑혀 당나라로 가게 된 것이었다.
그가 당으로 갈 때 아버지는 “10년 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나의 아들이라 하지 않겠다.”라며 엄한 훈계를 내렸다고 한다.
최치원은 유학 7년 만에 예부시랑 배찬(裵瓚)이 주관한 빈공과(賓貢科)에 합격했다.
과거에 합격한 최치원은 2년간 뤄양을 돌아다니며 시를 짓는 데 몰두했다.
그때 그가 쓴 작품이 《금체시(今體詩)》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五言七言今體詩)》 100수 1권, 《잡시부(雜詩賦)》 30수 1권 등이다.
876년(헌강왕 2) 당나라의 선주(宣州) 표수현위(漂水縣尉)가 되었다.
여기저기에서 지은 글을 추려 모은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1부 5권도 전한다.
최치원은 소도시의 현위로 만족하기에는 재능이 지나치게 뛰어났다.
그는 곧 고위 관리 시험에 도전하기로 하고 현위직을 그만뒀다.
하지만 수입이 끊긴 외국인이 고위 관리 시험을 본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경제적으로 궁핍했던 그는 이위(李蔚)의 문객(門客)이 되었고, 곧이어 회남 절도사 고변의 추천으로 관역순관이 되었다.
당시 당나라는 수재와 가뭄으로 민심이 흉흉한 상태였다.
왕선지에 이어 879년 황소가 난을 일으키자 최치원을 관역순관에 천거했던 고변이 제도행영병마도통으로서 난을 진압하게 되었다.
최치원은 자연스럽게 고변의 종사관이 되어 서기를 맡게 되었다.
이후 4년 동안 최치원은 고변의 군막에서 지내며 표(表), 장(狀), 서계(書啓), 격문(檄文)을 지었다.
그리고 879년에는 그 공적을 인정받아 승무랑 전중시어사 내공봉으로 도통순관에 임명되었고 포상으로 비은어대(緋銀魚袋)를 하사받았다.
882년에는 자금어대(紫金魚袋)까지 하사받았다. 문관으로서 그 자질을 황제에게 인정받은 것이다.
고변의 종사관으로 재직한 4년간 최치원이 지은 글은 1만 수가 넘었다.
특히 황소의 난에 부쳐 쓴 〈토황소격문〉은 명문으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되었다.
오늘날까지 전해지는 《계원필경(桂苑筆耕)》은 최치원이 귀국해 고변의 종사관 시절 지은 각종 글을 추려 모아 헌강왕에게 올린 것이다.
최치원의 글재주가 얼마나 뛰어났는지는 그가 쓴 글의 목록이 《당서(唐書)》 〈예문지(藝文志)〉에 기록되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당서》 〈열전〉에는 최치원의 전기가 빠져 있는데, 이는 당나라 사람들이 그의 문장을 질투했기 때문이라는 해석까지 나올 정도이다.
최치원은 이렇게 당에 머무는 17년 동안 고운(顧雲), 나은(羅隱) 등 이름 높은 문인들과 사귀면서 재주를 더욱 키웠다.
최치원이 귀국을 결심한 것은 그가 모시던 고변의 변화 때문이다.
고변이 본연의 업무에 관심을 두지 않고 신선이 되기를 바라며 도교 사원을 짓는 등 이상한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오랜 이국 생활에 지쳐 있던 최치원은 당나라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885년(헌강왕 11), 그의 나이 29세였다.
헌강왕은 최치원을 시독 겸 한림학사 수병부시랑 지서서감사에 임명했다.
이듬해 최치원은 왕명에 따라 〈대숭복사비문(大崇福寺碑文)〉 같은 명문을 지었고, 당에서 쓴 글을 모아 국왕에게 헌정했다.
하지만 신라는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방의 호족이 득세하면서 왕권이 약해졌고, 재정도 바닥나다시피 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각지에서 민란이 일어났을 정도이다. 결국 최치원은 894년 시무책 10조를 지어 진성여왕에게 상소했다.
문란한 국정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직언한 것이다. 이 일로 최치원은 6두품 최고의 관직인 아찬에 올랐지만 진성여왕의 개혁 의지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이듬해 최치원은 내란 시기에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을 위해 해인사의 공양탑 기문(記文)을 지었다.
이 기문에서 최치원은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 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하여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흩어져 있다.”라며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묘사했다.
진성여왕이 문란한 정치 상황에 대한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하자 최치원은 신라 왕실에 실망을 느끼고 관직을 버렸다.
이후 경주의 남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합포현(合浦縣, 지금의 창원)의 별서 등 전국을 떠돌다 해인사에서 여생을 마무리했다.
발췌 :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中 공부의 신, 최치원 편. 윤재운/청아출판사
석조삼존불상이 출토된 삼화령으로 추정되는 곳.
불상은 1925년 4월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하단 문화재청에서 가져온 사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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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 <사진=문화재청> |
경주 남산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삼국유사>에 조성내력이 기록되어 있는 신라 시대 불상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44년(선덕여왕 13)에 도중사(道中寺)의 생의(生義) 스님이 꿈속에서 어떤 스님이 자신을 꺼내어
안치해 달라는 말을 듣고, 경주 남산 북봉을 찾아가 삼존상을 발굴하여 삼화령(三花嶺)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이 불상은 신라 경덕왕 때의 승려 충담사(忠談師)가 중삼중구절(重三重九節,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였다는
‘삼화령 미륵세존’으로 비정(比定)됨에 따라, 정확한 하한연대를 알 수 있는 고신라 불교조각의 기준자료이다.
이와 같이 삼화령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고신라 불상으로서는 유일하게 조성유래와 조성시기, 조성 이후 충담사의
헌다공양(獻茶供養, 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공양) 등 불상에 담겨 있는 일련의 신앙행위를 자세하게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라 시대에 화랑(花郞)을 미륵의 화신(化身)으로 여겨 많은 미륵상을 제작한 역사적 사실과
신라화(新羅化)된 미륵신앙의 핵심적 단면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등,
이 불상이 한국 불교조각사상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비중은 매우 크고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남산신성 축대들
남산신성
경주 남산의 북쪽 산허리, 해목령을 중심으로 여러 돌로 쌓았으며, 그 둘레가 3.7km에 이른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진평왕 13년(591년)에 경주의 남쪽을 방어하기 위해 남산신성을 쌓았으며,
그 뒤 문무왕 19년(679년)에 다시 크게 쌓았다고 한다.
남산신성비는 이 성을 쌓을 때의 내용을 자세하게 기록한 비석으로 지금까지 모두 9기가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591년 성의 축조 당시 공사에 참가한 사람의 관직과 이름·출신지·맡은 구역과 함께,
3년 안에 성이 무너지면 어떤 벌도 달게 받고 다시 와서 쌓겠다는 맹세가 기록되어 있다.
이 비석에는 신해년 이라는 같은 연월일의 간지가 새겨져 있어『삼국사기』에 기록된 성의 축조연대가 정확한 것임이 밝혀지게 되었다.
또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한 집단의 평균 담당거리와 길이를 계산해보면 공사에 참여한 집단의 수는 200여 집단에 이른다.
한 집단이 1기의 남산신성비를 세웠으므로 원래는 200여기의 비석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남산신성 안에는 문무왕 3년(663년)에 지었다는 커다란 창고 터인 장창터가 세 군데 남아 있다.
이 가운데 북문터 가까이에 있는 중창터(가운데 창고의 터)는 군량미를 보관하던 창고 자리로서 지금도 불에 탄 쌀이 발견된다.
안내판에서 4-5미터쯤 떨어진 언덕배기에는 몇개의 돌이 포개어져 담을 이루고있기도 했다.
윤곽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신성의 흔적들..
이 일대에서 발견된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는 경주 남산의 남산신성南山新城을 쌓고 세운 비석이다.
남산신성은 박물관 남쪽에 위치한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바위가 게 눈처럼 튀어나와 붙여진 이름)을
둘러싸고 있는 둘레 3.7km의 돌로 쌓은 성[석성石城]인데, 지금은 쇠락衰落하여 성벽 대부분이 무너졌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남산신성은 진평왕眞平王(재위 579~632) 13년(591)에 처음 축성하였다.
남산신성비는 1934년 10월 경주 남산 식혜골食慧谷에서 발견된 이래 2000년까지 총 10개의 비석이 발견되었다.
그 내용은 맹세의 글, 축성에 참여한 인물, 그리고 각각의 집단이 쌓은 거리를 기록하고 있다.
이 비석은 어떻게 성을 쌓았는지는 물론 국가가 대규모 국책사업에 어떻게 백성들을 동원하였는지,
당시의 시대상은 어떠하였는지를 알려주는 귀중한 역사자료이다.
신성의 축대 흔적
경주 탑동이 내려다 보인다.
신라의 시조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그 곁에 있었다는 우물, 나정의 뜰이다.
한 눈에 보기에도 특이한 바위가 있는데 이름이 뭔지 어떤 유래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금오정
콘크리트로 만든 현대적인 모습의 금오정.
바닥과 공간을 띄운 1층의 기단 위에 12개의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 지붕 꼭대기로 이어지는 또 하나의 기둥을 세워 무게를 지탱하도록 했다.
지붕은 4각형으로 연꽃장식을 하고 그 위에 표주박 모양의 상륜부를 만들었다.
얼핏 불교양식 같기도 한데 주변 경관과 잘 어울려보이진 않는다.
포석곡제7사지 큰늠비절터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모습..
이곳저곳에 있던 석탑재들인데 망실을 우려해서 한곳에 모아 놓았다고 한다.
통일신라시대 조성된 삼층석탑의 부재로 추정되는 옥개석
포석곡제6사지에 위치한 늠비봉오층석탑 옆으로 주변에 있었던 사리탑과
탑재들을 한곳에 모아 두어 고대 문화와 만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늠비봉오층석탑
부엉골에서 늠비봉을 올라 다다른 늠비봉오층석탑
확 트인 전망과 푸른하늘이 맞닿은 듯한 풍경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곳에는 원래 4기의 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은데 그 중 5층석탑 하나만이 복원되어 있다.
전망대에서 시작하여 두 줄기 여울물이 포석계의 본류로 흘러드는데 북쪽으로 흐르는 여울을 작은 늠비라 하고
남쪽으로 흐르는 여울물을 큰 늠비라 부른다. 큰 늠비, 작은 늠비 사이에 솟은 삼각산이 늠비봉이다.
이늠비봉 위에 목탑을 본떠 세운 석탑(石塔)이 있었다.
지금은 파괴되어 탑재들만 흩어져 있으나 장하던 옛 모습을 추측할 수는 있다.
산 꼭대기에 솟아 있는 바위 윗면을 깎아 내고 몇 개의 가공석을 보태어 자연스러운 기단을 만들고 그 위에 대충 다듬은 석재로 탑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지금 남아 있는 탑재들로 미루어 보아 옥개석의 낙수면이 넓은 백제계열의 오층석탑이었다고 추측된다.
4개의 석재를 조립하여 한 개의 옥개를 이루었는데, 만일 옥개받침까지 조립식이었다면 하나의 옥개에 여덟 개의 석재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 개의 옥개석을 여러 개의 석재로 조립하여 만든 예는 통일신라 초기의 감은사(感恩寺)나 고선사(高仙寺)의 탑에서도 볼 수 있는 예이지만
이 탑의 특이한 점은 옥개의 낙수면 모서리에 귀마루가 높게 새겨져 있는 점이다.
또 이 탑의 위대함은 산봉우리를 기단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삼각산 위에 솟아있는 자연바위를 잘라 버리고, 모자라는 부분에는 다듬지 않은 석재를 보충하여 자연 반, 인공 반인 기단을 만들어 놓았다.
얼금얼금 깨뜨린 석재들은 인공적인 탑신에 어울리고 우툴두툴한 자연 석재들은 자연적인 바위산에 조화되어 삼각산은 하늘에 닿은 탑으로 승화되었다.
자연과 인공을 연결시켜 놓은 위대한 착상이라든가 석재를 얼금얼금 다듬은 구수한 수법은 우리 예술이 지닌 가장 고상한 장점이라 하겠다.
크고 작은 기묘한 바위로 얽혀 두 줄기의 계곡물 사이에 솟은 삼각산 위에 탑이 섰으니 산이 바로 하나의 탑이다.
부엉계곡은 이 탑 하나로 불국토의 영기(靈氣)로 차 있는 것이니 자연과 인공이 이렇게 조화된 예는 드물 것이다.
<신라문화진흥원 발췌>
부흥사[富興寺]
대한불교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다.
대웅전 앞에서 누군가...
부흥사 내부
마애여래좌상
석재가 좋지않아서인지 누런 돌가루가 떨어져 있고 얼굴 윤곽의 상당 부분이 손상되었다.
경주 배리 윤을곡 마애불좌상
[유형문화재 제195호]
경주시 남산의 여러 계곡 가운데 하나인 윤을곡(潤乙谷)의 ㄱ자형 바위벽에 새긴 불상이다.
동남향한 바위면에 2구, 서남향한 바위면에 1구를 새겨 삼존불(三尊佛)의 형식을 띠고 있는데, 그 배치가 매우 특이하다.
중앙의 불상은 연꽃 대좌(臺座) 위에서 앉아 있다.
정수리 부분에 있는 상투 모양의 머리묶음이 유난히 높고 크며, 얼굴은 긴 타원형을 이룬다.
턱은 각진 것처럼 표현하여 다소 완강한 느낌을 주지만, 눈을 가늘게 뜨고 입에는 미소를 띠고 있어 대체로 부드러운 인상이다.
오른손은 마멸이 심해 확실하지는 않지만 손바닥을 보이며 손끝을 위로 향하고 있고, 왼손은 내려 무릎에 걸쳐 손끝이 땅을 향하도록 하고 있다.
오른쪽 불상은 본존불보다 조금 작고 위축된 느낌이 든다.
양감있는 얼굴은 부드러운 느낌을 주며, 양 어깨가 치켜 올라간 신체는 사각형으로 처리되었다.
상체가 짧은데 비해 하체가 길어서 비례가 잘 맞지 않는다.
오른손은 무릎에 얹어 손가락을 살짝 구부리고, 왼손은 배에 대어 약그릇을 들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약사여래로 생각된다.
왼쪽의 불상은 3불상 가운데 조각 솜씨가 가장 떨어진다.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세부를 마무리하지 않고 턱이나 윤곽선 등을 선으로만 처리하여 전체적인 인상이 생생하지 못하다.
신체 또한 사각형으로 평평하고 양감이 없다. 왼쪽 불상의 광배 왼쪽에 ‘태화9년을묘(太和九年乙卯)’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이들 불상이 신라 흥덕왕 10년(835)에 조각된 것임이 밝혀졌다.
오른쪽 마애불좌상
전체적인 인상이 잘 나타나지 않는 왼쪽 불상
9세기 전반 통일신라의 불상양식 연구에 매우 중요한 예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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