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답사 7> 노동노서고분군, 대릉원, 첨성대, 계림
노동노서고분군, 대릉원, 첨성대, 계림
답사일 : 2017. 9. 12
노동노서고분군
노동과 노서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나뉘어져 있다.
경주고분군은 사적 제39호.
중요발굴고분으로 금관총, 서봉총, 호우총, 마총, 쌍상총, 노서동 215번지 고분 등이 있다.
이 고분군은 크게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과 돌방무덤[石室墳] 2가지 유형으로 구분된다.
매년 5월, 노동·노서 고분군 고유제가 노서 고분군 서봉총 일원에서 거행되고 있는데 올해로 19회를 맞이했다.
고유제에서는 노동·노서고분의 유래를 소개하고 국악연주, 대금연주, 살풀이 등 공연이 풍성하고
고분군 발굴 당시 사진을 전시해 시민과 관광객에게 볼거리를 제공한다고 한다.
고분과 파란 잔디가 어우러진 모습
수령이 꽤 오래된 나무들이 무덤위에 자라는 신기한 관경
봉황대
봉황대는 고려의 시조 태조왕건과 관련된 전설이 하나 내려온다
태조 왕건이 신라를 멸망시킬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도선국사가 꾀를 내어 말하기를
"경주는 배의 한복판에 봉황이 있는 형세이며, 그 한 복판에 봉황의 알을 얹으면 배를 침몰시킬 수 있다"고 했다고 하다.
황건이 그 뜻을 따라 도선을 신라로 보내 경주 중심에 봉황의 알(봉황대)을 만들게 하는 계략을 세워 마침내 신라를 멸망시켰다는 이야기다.
'봉황대'비를 가까이서 담아본다.
봉황대는 단일 고분으로는 황남대총 다음으로 큰 고분이다.
고분이 아니라 작은 동산에 가까운 모습인데 아직까지 미발굴 고분으로 수령이 오래된 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금령총
1924년 우메하라[梅原末治] 등이 발굴·조사했다.
껴묻거리인 금관(보물 제338호)에 금령(금방울)이 달려 있어서 금령총이라고 하였다.
땅 밑으로 3m 깊이의 구덩이를 파고 냇돌을 깐 바닥에 덧널[木槨]을 설치한 다음,
그 주위에 돌무지를 쌓고 봉토를 만든 돌무지덧널무덤[積石木槨墳]이다.
널은 모두 없어졌고, 껴묻거리는 보존이 잘된 상태로 출토되었다.
무덤의 주인공이 차고 있던 껴묻거리는 금관·금귀걸이·목걸이·팔찌·반지·허리띠·띠드리개 등 꾸미개와 작은고리칼[小型環頭大刀] 등이 있다.
널 동쪽의 껴묻거리 상자에서는 꾸미개·마구·용기 등이 출토되었다.
꾸미개는 채양·관모·금동신발·은허리띠·띠드리개가 있고, 마구는 안장틀·발걸이 등이 있으며,
금동합(盒)·쇠솥·칠기와 기마인물형토기·배모양토기 등의 용기류, 철기·청동거울도 출토되었다.
고분의 주인공은 당시의 최고신분에 속하며, 나이가 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고분의 연대는 출토유물로 보아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보고 있다
황남대총
대릉원내에 있는 가장 큰 쌍분인 제 98호 고분
남북으로 2개의 무덤이 연결되어 있는 쌍무덤 표형분으로 경주내 고분 중 최대규모에 포함된다.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조사되었다.
서봉총 발굴조사 현장
서봉총은 신라의 전형적 무덤구조인 돌무지덧널무덤이다.
덧널 내부 서쪽에 널을 안치하고 동쪽과 널 주위에 껴묻거리를 배치했다.
널 속에는 머리를 동쪽으로 둔 피장자가 착용한 금관을 비롯한 각종 금제장신구가 있었다.
금관은 나무와 사슴뿔 모양의 장식이 있는 신라의 전형적 형태이며 그 안에 3마리의 봉황 모양 장식을 붙인 십자형의 내관이 있어 특이하다.
널 동쪽에 쇠솥 2개와 각종 토기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칠기, 금·은·청동제 용기류, 유리용기, 마구, 각종 유리구슬이 있었다.
연수는 신라와 빈번한 관계를 가졌던 고구려의 연호로 보이므로 5세기 중엽·후엽 사이에 고분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대릉원
경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신라 고분군으로, 유명한 천마총, 미추왕릉, 황남대총 등이 바로 이 대릉원 안에 위치해 있다.
천마총은 1973년부터 1975년까지 발굴 조사되었는데, 천마총과 황남대총 모두에서 많은 유물이 나와 큰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경내가 공원처럼 되어 있어 산책을 즐기기에도 좋은데 특히 이곳 주변은 봄이면 벚꽃이 만개하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노동리 고분군 건녀편으로 대릉원이 자리잡고 있다.
연못과 어우러진 봉분이 운치있다.
봉분과 봉분 사이에, 고목 한 그루..
천마총 내의 유물들..
천마총은 경주시 황남동 고분군(古墳群)에 속하는 제155호 고분이다. 장신구류 8,766점, 무기류 1,234점, 마구류 504점, 그릇류 226점, 기타 796점으로 모두 1만 15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 중 일부가 국립경주박물관 별관에 보관되어 있는데,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금관(金冠)과 천마도장니(天馬圖障泥)이다. 금관은 지금까지 발견된 신라시대 금관 가운데 금판(金板)이 가장 두꺼우며 금의 성분도 우수한 것으로 판명되었고 국보 제 188호로 지정되었다. 또한 천마도장니는 천마총 출토품 가운데 세상을 가장 놀라게 한 유품이다. 장니란, 말 양쪽 배에 가리는 가리개로, 흙이나 먼지를 막는 외에 장식물로도 사용되었다. 자작나무 껍데기를 여러 겹으로 겹쳐서 누빈 위에 하늘을 나는 천마를 능숙한 솜씨로 그렸는데, 지금까지 회화 자료가 전혀 발견되지 않았던 고신라의 유일한 미술품이라는 데 큰 뜻이 있다. 이 고분의 명칭을 천마총이라고 한 것도 여기에 연유한 것이며, 지금은 이러한 것들을 볼 수 있도록 무덤 내부를 복원하여 공개하고 있다.
대릉원 미추왕릉
김알지의 후예로 신라 최초의 김씨 왕인 신라 제13대 미추왕(재위 262~284년)을 모신 곳이다.
대나무가 병사로 변하여 적군을 물리쳤다는 전설에 따라 '죽현릉'이라고도 한다. 특이하게 담장을 둘러 무덤 전체를 보호하고 있다.
내부 구조는 돌무지덧널무덤일 것으로 추정된다.
첨성대
국보 제31호로 신라 선덕여왕 때(재위 632∼647)에 축조. 높이 약 9.5m
현재까지 남아 있는 천문대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 되었다. 첨성대의 구조는 기단부·원주부·정자형두부로 나누어진다.
첨성대 전체의 석재는 화강암으로 총석재수는 365개 내외이고,
기단부, 원주부의 외벽과 정자형 두부는 다듬어져 있으나 내벽은 다듬어져 있지 않다.
첨성대에 관한 기록으로는 〈삼국유사〉에 최초로 나오며 〈고려사〉에도 이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첨성대 안을 통해 사람이 오르내리면서 천문을 관측했다는 기사가 있다.
첨성대가 천문대라는 견해는 1960년대까지 정설이었지만 반론도 제기된다.
구조적으로 볼 때 오늘날의 천문대와는 다르지만 소박한 의미의 천문관측대라고 할 수 있다.
황남동 대형건물지
이곳은 신라의 성장과 발전과정에서 대단히 의미 있는 장소로 여겨진다.
황남동 대형건물지는 경주 고적 발굴조사단이 1988년 발굴조사를 하였으며,
2006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추가 조사를 진행하여 15기의 건물지를 확인하였다.
대형건물지의 배치는 중국 주나라의 칠묘와 닮았으며, 담장형 석렬은 중국의 영벽과 유사하다.
석렬 남쪽에는 지진구로 보이는 5점의 항아리가 일렬로 묻혀 있어
건물지들은 신라의 오묘와 같은 제의시설로 추정하기도 한다.
특히 문헌과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황금빛이 나는 황철 안료의 실물이
10호 건물지의 지진구에서 처음으로 확인되어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조성시기는 출토된 유물로 보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7세기 말 이후로 추정된다.
멀리, 신라시대 때에 놓여진 교각이 아직 원형 그대로 놓여져 있다.
계림(鷄林 ) 비각 입구
경주김씨 시조의 발상지, 사적 제19호, 경북 경주시 교동
원래 시림이라 하여 신라초부터 있던 숲으로 경역은 약 7,300㎡이며 느티나무·물푸레나무·싸리나무 등의 고목이 무성하다.
〈삼국유사>신라 시조 혁거세왕조에 보면, 왕은 계정에서 태어났고 왕비 알영은 계룡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계림국이라 나라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러나 계림의 계(鷄)를 '새'로 읽어 계림은 '새벌'의 다른 표기에 불과하다는 설이 유력하다
경주 내물왕릉 (慶州奈勿王陵 )
보호구역 1만 2818㎡, 밑지름 2.2m, 높이 5.3m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신라 제17대 내물마립간의 능. 사적 제188호. 고분의 형태는 원형봉토분이다.
경주 향교(鄕校)의 북방 얕은 언덕 위에 있으며, 대형의 둥근 토분(土墳)이다. 봉분의 밑면 주변에 자연석의 한 모서리가 노출되어 있는데,
이는 무열왕릉(武烈王陵)의 경우와 같이 그 안에 별도의 호석(護石)이 설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삼국사기》에는 내물왕의 장지에 관한 기록이 없으나, 《삼국유사》에 첨성대(瞻星臺) 남서쪽에 있다고 기록되었으며 현위치와 일치한다.
초기의 왕릉으로서는 비교적 형식을 잘 갖추고 있다.
계림 향가비
신라 경덕왕때 승려 충담사가 지었고 화랑 기파랑을 추모하는 내용의 10구체 향가이다.
향가비 한쪽 면에는 일연스님의 업적이 다른 한쪽 면에는 찬기파랑가가 기록되어 있다.
讚耆婆郞歌 / 忠談師
찬기파랑가 / 충담사
咽嗚爾處米
露曉邪隱月羅理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沙是八陵隱汀理也中
耆郞矣兒史是史藪邪
逸烏川理叱磧惡希
郞也持以支如賜烏隱
心未際叱肹逐內良齊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흐느끼며 바라보매
이슬밝힌 달이
흰구름 따라 떠간 언저리에
모래 가른 물가에
기랑의 모습이올시 수풀이여
일오내 자갈 벌에서
낭이 지니시던
마음의 갓을 좇고 있노라
아아, 잣나무 가지가 높아
눈이라도 덮지 못할 고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