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 여행 24>연홍도, 소록도
여행기 그 스물네번째 : 소록도, 연홍도
다녀온 날 : 2017. 7. 1 - 2 (1박 2일)
여행 코스
첫째날 : 거금도 신양항 출항 - 연홍도 도착 - 연홍도 산책하기(4km)
미술관-마을회관-마을기업쉼터-아르끝-당산-마을기업식당-당산나무-해안도로-좀바끝
둘째날 : 미술관 - 연홍도 출항 - 소록도 탐방
한국 최초의 ‘예술섬’ 연홍도와 ‘사슴섬’ 소록도를 여행한다.
연홍도의 원래 이름은 맛도[馬島]였는데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연홍도(蓮洪島)로 바뀌었다.
맛도 혹은 마도란 이름은 섬의 형상이 말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연홍도와 주변 해역에는 말머리, 말꼬리, 말풍경, 말붕알, 말먹이 등 말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그리고 또 하나의 섬. 소록도..
한센병 환자들의 한과 아픔이 서려있는 소록도(小鹿島)는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있다.
지금도 700여 명의 한센인들과 의료진, 자원봉사자들이 공동체를 이루며 함께 살아간다.
울창한 해송숲과 백사장이 아름답지만 일제강점기 끌려와 강제 수용되었던 한센병 환자들의 고통이 서려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면적 3.79㎢, 해안선길이 12㎞.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5월 조선총독부령 제7호에 의해 ‘소록도자혜병원’으로 설립된 뒤
‘소록도갱생원’ ‘국립나병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다 지금에 이르렀다.
고흥 신양항에서,, 작은 배에 몸을 싣는다.
5분이면 닿는 연홍도가 뒤로 조망된다.
인근의 작은 섬과 바다풍경..
타자마자 닿은 연홍도..
언덕에 서면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아담한 섬이다.
전남 고흥군 금산면 연홍도는 면적 0.55㎢, 해안선 길이 4㎞에 불과할 정도로 작은 섬이다.
고흥반도 녹동과 다리로 연결된 소록도를 지나면 거금도가 나오는데 거금도 역시 소록도와 다리로 연결되어 내륙으로 편입됐다.
덕분에 연홍도로 가는 길이 가까워졌다. 연홍도는 고흥의 거금도와 완도의 금당도 사이에 있는 작은 섬이다.
연홍도의 상징, 쌍둥이 소라 조형물
전남 고흥군 연홍도(蓮洪島)는 한국 최초의 예술섬이다.
작은 섬마을 안길과 해변을 거닐며 예술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어 보는 재미가 있다.
조용하고 아담한 어촌풍경
눈과 마음까지 시원해진다..
바다를 배경으로 설치된 센스있는 예술작품들..
곳곳에 조개껍질과 부표, 로프, 폐목들을 활용한 정크 아트 부조 작품 등 60여 점의 예술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물때에 따라 수면에 드러나는 조형물,
은빛물고기
수령이 300년 된 팽나무
정부인김해김씨효열비와 열녀 경주김씨를 기리는 비석..
내용은 이러하다.
김해김씨 부인은 밀양 박씨였던 남편이 사망하자 곡기를 끊고 2개월 후 죽음을 맞이했다.
경주김씨 부인은 남편이 중병에 걸려 위중해지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칼로 베어내 남편에게 구워먹여 병을 고쳤다고 한다.
지금은 엽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당시에는 효녀와 열녀로 칭송받았다.
연홍도는 해안선 둘레가 겨우 4㎞인 자그마한 섬이다.
푸른색과 붉은색 지붕 앞으로 파릇한 밭고랑이 싱그럽다.
유색의 유람선이 바다를 수놓는다..
힐링과 사색을 갈망하는 관광객이라면, 연홍도를 추천하고 싶다..
'바다가 아름다운 건 섬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생각난다..
섬 북쪽 해안가에는 갯바위 낚시도 가능하고 썰물때를 맞춰가면 조개류 채취도 가능하다.
우편함도 담아본다..
연홍도 출신 프로레슬러 백종호선수, 박치기왕 김일선수 포토존도 있다.
마을의 담벼락, 바닷가와 골목 곳곳에 아기자기하고 예쁜작품들이 가득해서
온 마을이 자유로운 미술관 같다.
살짝 흐린 날이지만 시원한 바다의 조망이 아름답다.
작은 해안가가 한적하다..
섬마을의 밭농사 풍경..
한때 김양식으로 명성을 떨치던 섬은 197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135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52가구 82여명만 남았다.
연홍도의 원래 이름은 마도였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연홍도로 바뀌었다.
마도란 섬의 형상이 말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연홍도와 주변 해역에는 말머리, 말꼬리, 말풍경, 말붕알, 말먹이 등 말과 관련된 지명이 많다.
산책로처럼 평탄한 4㎞의 섬 횡단 트레일을 따라 걸으며 말과 관련된 지명들을 찾아보는 것도
연홍도를 방문한 관광객에게 추천거리이다.
누군가에게는 귀중한 삶의 터전...
해바라기들이 싱그럽다.
꽃도 나무도 초록으로 뒤덮혀 한적한 길을 걷는다..
나무그늘 아래서 잠시 쉼을 얻고..
해안가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좀바' 이 재미있는 이름은 외래어가 아니다.
붉은색을 띤 생선인 쏨뱅이를 주민들이 일컫는 의미의 '뱅이'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나무 표지판도 아기자기 예쁘다
기울어져가는 하루에 바다색이 은빛으로 출렁인다.
미술관을 오늘 탐방할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맞지 않아 내일로 미룬다.
연홍도의 밤은 서서히,, 바다 멀리서 찾아오는 듯 하다.
<둘째 날>
해무가 몽황적인 아침이다.
해안은 대부분 사질해안이나 곳곳에 암석해안도 있다.
서쪽의 모래 해변에는 동백나무․곰솔 등이 무성한 해수욕장이 있다.
‘연홍길 94’가 부착된 이순신 동상이 있다
해수욕장에서 오른쪽으로 학교 터가 보인다. 바로 ‘연홍미술관’이다.
알록달록한 기둥을 지나면 학교 터. 왼쪽 학교 담장 옆으로 해안길이 계속 이어지고
입구에 오른쪽 기둥 위에 ‘연홍미술관’이라는 간판이 있다
연홍미술관
연홍미술관은 1998년에 폐교된 연홍분교장을 개조하여 미술관으로 꾸미고,
2006년 11월 개관했다. 정식 명칭은 ‘섬in섬 연홍미술관’이다.
섬 속의 유일한 미술관으로 명성을 얻어가며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던 연홍미술관은
2012년 볼라벤 태풍의 피해를 입으면서 침체기를 겪었다.
정원을 다시 꾸밀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남도의 ‘가고 싶은 섬’ 사업에 힘입어 다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했다.
섬에서 느끼는 미술관의 한갓짐.. 좋다.
자그마한 폐교를 리모델링한 미술관은 문을 열면 바다가 눈앞으로 밀려드는 낭만적인 곳이다.
이 섬 출신으로 어릴 적 추억을 안고 고향을 떠났던 김정만 화백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돌아와
폐교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부활시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섬안에,, 미술관이라..
연홍도를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누구든지 기대해도 무리가 없겠다.
아름다운 남쪽바다를 정원으로 들인 미술관은 연홍미술관이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하며
연홍도를 출항하여 녹도항에서 소록도로 이동할 예정이다.
녹도항으로 다시 이동하여..
녹동항에서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소록도(小鹿島)로 향한다.
‘천형(天刑)의 땅’으로 불리던 소록도는 섬 면적이 겨우 4.4 2㎞에 불과하다.
일제강점기 때 강제 격리된 한센병 환자들이 삶을 버텨야 했던 가슴 시린 섬으로 2009년 연륙교가 생겼다.
아침 안개가.. 정박된 소형배들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다
소록도 입구에 보이는 '수탄장(愁嘆場)'
한자 그대로 '탄식의 장소'이다..
한센병에 걸린 부모들이 핏덩어리 같은 자식과 한 달에 한 번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만났던 곳이다.
일제강점기 인권을 유린당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곳,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안타깝다.
소록도는 전남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녹동항에서 1㎞가 채 안되는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과 비슷하다고 하여 소록도라고 불리운다.
이 섬은 한센병 환자를 위한 국립소록도병원이 들어서 있는 섬으로 유명하다.
과거 한센병 환자들의 애환이 깃들어 있는 섬이지만, 현재는 700여명의 환자들이 애환을 딛고 사랑과 희망을 가꾸고 있다.
섬의 면적은 4.42㎢에 불과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과 해안절경, 역사적 기념물 등으로 인해 고흥군의 새로운 관광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작년 2016년, 개원 100주년을 맞은 전남 고흥 소록도병원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설립된 소록도 자혜의원에서 시작되는데, 이 병원은 당시 조선 내의 유일한 한센병 전문의원이었다.
이곳의 중앙공원은 1936년 12월부터 3년 4개월 동안 연인원 6만여 명의 환자들이 강제 동원되어 19,834.8m²(6천평) 규모로 조성되었다.
지금도 공원안에 들어서면 환자들이 직접 가꾸어 놓은 갖가지 모양의 나무들과 함께 전체적으로 잘 정돈되어 있다.
그리고 공원 곳곳에는 환자들의 아픔을 간직한 역사기념물들이 잘 보존되어 있다.
소록도 병원은 몇 년 전부터오스트리아 출신 마리안·마가레트 수녀의 헌신적인 봉사활동이 알려지면서
소록도 자원봉사활동에 대한 관심도 커져 자원봉사자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국립 소록도병원한센병박물관
국립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을 맞이하여 지난 2016. 5. 17 개관하였다.
박물관 내부 전경은 테마별로 잘 정돈되어 있었다.
소록도병원의 역사도 있고..
소록도병원에 봉사활동을 다녀간 자원봉사자들의 이름도 있고..
오랜 세월 편견 속에서 슬픈 삶을 살아온 한센인들의 가슴앓이에 대한 감성이 전해진다.
소록도 사람들의 생활용품들..
한센병 환자를 환자가 케어할 수 밖에 없었기에 간호보조원 양성소도 있었다고 한다.
일제가 한센인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감금실..
방마다 철장이 되어있고 형무소처럼 한쪽에서 용변을 볼 수 있게 만들어놨다.
이곳에서 한센인들을 감금하고 감식, 금식, 체벌, 강제 노역을 시켰다고 한다.
더 놀라운 건 이곳을 출감할 때는 무조건 단종수술(정관절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소록도 건물 곳곳에 한센인들이 한이 서려있다.
그들의 생활용품들만 봐도 가슴이 아리다..
“한센병은 낫는다” 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는 구라탑
환자들의 애환과 박애정신을 엿볼 수 있는 기념물이다..
마리안느, 마가렛 수녀..
이분들에 대해서 매스컴에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다.
40여 년 간을 소록도에서 한센인들을 돌보며 봉사하셔서 '소록도 천사'로 불리는 분들이다.
그 분들의 이야기를 소개한 한 매체의 글을 옮겨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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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도에서 43년 동안 한센병 환자를 보살펴 온
외국인 수녀 2명이 편지 한 장 달랑 남기고 떠났습니다.
소록도 주민들은 이별의 슬픔을 감추지 못한 채
일손을 놓고 성당에서 열흘 넘게 두 수녀님을 위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소록도에서 평생을 환자와 함께 살아온
마리안(71) 그리고 마가레트(70) 수녀가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떠난것입니다.
마리안 수녀는 1959년에, 마가레트 수녀는 1962년에
소록도에 첫발을 디뎠습니다
두 수녀는 장갑을 끼지 않은 채 환자의 상처에 약을 발라줬습니다.
또 외국 의료진을 초청해 장애교정 수술을 해 주고
한센인 자녀를 위한 영아원을 운영하는 등
보육과 자활정착사업에 헌신했습니다.
정부는 이들의 선행을 뒤늦게 알고
1972년 국민포장, 1996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습니다.
두 수녀는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습니다.
'사랑하는 친구 은인들에게’ 란 편지 한 장만 남겼습니다.
편지에서
“나이가 들어 제대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어
우리들이 있는 곳에 부담을 주기 전에 떠나야 한다고
동료들에게 이야기해 왔는데 이제 그 말을 실천할 때라 생각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또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 마음 아프게 해 드렸던 일에 대해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김명호 소록도 주민자치회장은 "주민에게 온갖 사랑을 베푼 두 수녀님은
살아있는 성모 마리아였다”며 “작별인사도 없이 섬을 떠난 두 수녀님 때문에
섬이 슬픔에 잠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43년간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한 마가레트 수녀와 마리안 수녀는
오스트리아 간호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소록도병원이 간호사를 원한다는 소식이 소속 수녀회에 전해지자
1962년과 66년 차례로 소록도에 왔습니다.
환자들이 말리는데도 약을 꼼꼼히 발라야 한다며
장갑도 끼지 않고 상처를 만졌습니다.
오후엔 손수 죽을 쑤고 과자도 구워서 바구니에 담아 들고
마을을 돌았습니다.
소록도 사람들은 전라도 사투리에 한글까지 깨친
두 수녀를 ‘할매’라고 불렀습니다.
꽃다운 20대부터 수천 환자의 손과 발이되어 살아 왔는데,
지금은 일흔 할머니가 됐습니다.
숨어서 어루만지는 손의 기적과,
주님밖엔 누구에게도 얼굴을 알리지 않은 베품이
참 베품임을 믿었던 두 사람은 상이나 인터뷰를
번번이 물리쳤습니다.
10여년전 오스트리아 정부 훈장은
주한 오스트리아 대사가 섬까지 찾아와서야 줄 수 있었습니다.
병원 측이 마련한
회갑잔치마저 '기도하러 간다'며 피했습니다.
두 수녀는 본국 수녀회가 보내 오는
생활비까지 환자들 우유와 간식비,
그리고 성한 몸이 돼 떠나는 사람들의 노자로 나눠줬습니다.
두 수녀의 귀향길엔 소록도에 올 때 가져왔던
해진 가방 한 개만 들려 있었다고 합니다.
외로운 섬, 버림의 섬, 건너의 섬에는
두 성녀가 다녀가신 곳인가요
상처받은 사람들을 반세기 가깝게 보살핀
두 수녀님의 사랑의 향기는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어두운 곳을 밝히고 추운 세상을 덥혀 주리라고 믿습니다.
이제는 70세가 된 마리안 수녀님
"처음 왔을 땐 환자가 6000명이었어요.
아이들도 200명쯤 되었고,
약도 없고 돌봐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한사람 한사람 치료해 주려면
평생 이곳에서 살아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
이 두 분은 팔을 걷어붙이고, 환자들을 직접 치료하기
시작한 것이 40년이 된 것입니다.
할 일은 지천이었고, 돌봐야 할 사람은 끝이 없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40년의 숨은 봉사...
이렇게 정성을 쏟은 소록도는 이제 많이 좋아져서,
환자도 600명 정도로 크게 줄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알려질 까봐, 요란한 송별식이 될까봐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두 분은 배를 타고 소록도를 떠나던 날,
멀어 지는 섬과 사람들을 멀리서 보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울었다고 했습니다.
20대부터 40년을 살았던 소록도였기에,
소록도가 그들에게는 고향과 같았기에,
이제 돌아가 고향 오스트리아는
40년 세월이 흐른 지금
오히려 낯선 땅이 되었습니다.
지금 수도원 3평 남짓 방 한 칸에 살면서
소록도가 그리워 방을 온통 한국의 장식품으로 꾸며놓고
오늘도 '소록도의 꿈'을 꾼다고 했습니다.
그 분의 방문 앞에는
그분의 마음에 평생 담아두었던 말이
한국말로 써 있다고 합니다.
'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라'
"지금도 우리 집,우리 병원 다 생각나요.
바다는 얼마나 푸르고 아름다운지...
하지만 괜찮아요.
마음은... 소록도에 두고 왔으니까요!"
<연홍도, 소록도 : 인문학습원 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