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씨 고택
청송 심부자와 함께 영남 만석꾼의 대표 주자로 꼽히는 경주 최부잣집은 300여년 간 12대를 이어간
부자로도 유명하지만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했다는 점에서 더 큰 의미를 지닌다.
경주 최씨의 종가, 경주 최부잣집이 위치한 공간은 신라 시대 요석 공주가 기거했던 요석궁이 있던
자리라고 알려져 있다. 1700년경 지어졌다고 전해지며 12대에 걸쳐 300여 년간 부를 유지했다.
아흔 아홉 칸으로 지어졌으나 1970년 사랑채와 별당이 불에 타 버렸다.
그래도 조선시대 사대부가의 원형을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크다. 최씨 집안에서 여러 대에 걸쳐 빚어온 경주
교동 법주를 비롯해 경주 향교, 2013년 1월 가오픈한 경주 교촌 마을 등이 근처에 자리한다.
경주 최부잣집에 들어서면 먼저 최부잣집의 가르침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 벼슬을 하지 마라', '만 석 이상의 재산은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늘리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주변 100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시집 온 며느리는 3년간 무명옷을 입어라'는 육훈(六訓)이 눈에 띈다.
최부자의 1대는 최진립이다. 2대 최동량은 많은 재산을 물려받고 큰 땅을 구입한다.
그리고 그 뒤를 이은 최국선은 흉년이 들어 농민들이 쌀을 빌려간 것을 못 갚자
아들 앞에서 담보 문서를 모두 없애고 죽을 쑤어 거지들에게 푸짐하게 나눠준다.
배고픈 보릿고개 때에는 100석의 쌀을 베푼다.
'사방 백 리에 굶어 죽는 자가 없도록 하라'는 최부잣집의 선행 덕분으로 활빈당의 불길 속에서도 최부잣집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12대 최준에 이르러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자 '나라가 없으면 부자도 없다'는 신
념으로 독립 자금 마련에 재산을 내놓는다. 광복 후에는 교육 사업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도 했다..
현대와 전통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최부잣집 안채
최씨고택은 경주 최씨의 종가로 1700년 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경주 궁궐 내 남천을 끼고 남향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조선 중기에 이곳으로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 시대 양반집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모습..
기품이 있다..
관리를 위해 무던히도 고민하여 장인의 손을 빌어 지금까지 잘 보존되고 있는 모습이다..
명부(名富)의 격조와 품격을 갖춘 경주 최씨 고택..
가을의 중간,, 감나무도 풍년이다..
자녀와 함께 방문하여 최부자의 가르침을 알려주는 것도 좋을 듯하다..
가난한 농민들에게 곶간을 열어 양곡을 나누어주고 선행을 많이 한 가문..
한때는 경주 최부잣집으로 불리던 교동최씨고택.. 고즈넉하다..
경주 교동법주
경주 최부자집 가양주로, 그 역사가 자그마치 350년이 되었다고 한다.
'경주 최부자네'집안에서만 이어져 내려온 법주로 배영신(裵永信)이 중요무형문화재 제86호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전승시키고 있다.
배영신은 현재 50여 년째 이 술을 만들어오고 있다고 한다..